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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국력 비교 역사

262년 중국의 형세를 나타낸 지도(위키백과)

한마디로 삼국이라고 해도 그 국력은 결코 동등하지는 않았다. 후한은 전국을 13주로 나누고 자사刺史를 두어 감독했는데, 위는 중앙의 사예주司隸州 외에 유幽·기冀·청靑·서徐·연兗·예豫·병幷·량凉주 합쳐서 9주, 오는 양揚·형荊·교交주의 3주, 촉한蜀漢은 익주益州 1주뿐이다. 그러면 9:3:1의 비례가 되지만 단 오·촉은 면적이 넓고 개발이 왕성한 토지이므로 호구戶口의 숫자는 비교적 많아지고 있었다. 지금 263년경의 통계를 비교하면

위: 호 66만, 구 443만
오: 호 52만, 구 230만
촉: 호 28만, 구 94만

으로 되어 있어, 호수戶數의 비율은 대체로 7:5:3의 비율이지만 이것이 국력을 표시하는 비율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인구수의 비율은 대략 4:2:1로 되어 이 수치가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되는데, 다만 위의 인구수는 실제로는 더욱 많았던 것이 틀림없으므로 결국 삼국의 실력은 6:2:1의 비율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지금 제시된 숫자를 기계적으로 합하면 호 146만, 구 767만이 된다. 이를 후한 환제 영수永壽 3년(157)의 통계, 호 1,067만, 구 5,648만과 비교하면 모두 약 7분의 1로 감소해 있다. 물론 통계에는 늘 오차가 따르게 마련이고, 특히 이 경우 장원에 흡수된 예농隸農 등은 보고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실제 숫자는 이만큼 격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부가 장악할 수 있었던 호구가 감소한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당시의 기록에 해내海內가 황폐쇠잔해서 존속하는 인호人戶가 열에 하나, 둘도 안 된다고 한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삼국 가운데 위는 낙양에 도읍하고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9주를 영유해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했다고 해도 이 지방은 동시에 가장 심각한 전화戰禍를 입었으므로 무제 조조, 문제 조비 2대에 걸쳐 몇 번이나 양자강 변으로 진격해 오를 평정하려 했지만 전투력이 지속되지 않아 그때마다 실패했다. 수량에서 열세에 선 오와 촉은 공수동맹을 맺어 서로 상대가 대등한 황제임을 승인한 다음에 공동전선을 폈으므로 위로서도 전력을 다해 공세를 취하는 데는 위험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일단 형세가 안정되고 질서가 정돈되기 시작하자 위의 수적 우위가 주효하게 된다.
-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1901~1995]의 『중국통사』에서

위(魏), 촉(蜀), 오(吳)의 인구수를 견줘 삼국의 국력 차이를 가늠해 본 일본의 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 선생의 글입니다. 고대는 인구수가 곧 국력으로 이어진 시대인 만큼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설명입니다. 미야자키 선생이 말한 대로 촉과 오가 손잡아도 위가 두 배쯤 힘이 셌지만, 그만큼 위는 전선이 길어서 온 힘을 한곳에 쏟기가 어려웠습니다. 삼국 가운데 최약체인 촉이 북벌에 모든 것을 걸어 볼 만한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에 나선 제갈량(諸葛亮)은 오장원에서 쓰러졌습니다. 그 뒤에 강유(姜維)가 분발했음에도 위와 촉의 국력 차이는 나날이 더 벌어졌지요. 그리고 263년에 촉이 삼국에서 가장 먼저 멸망을 맞았습니다. 예정된 결말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도 지방 정권에 안주하지 않고서 중원으로 끊임없이 나아가고자 한 촉의 국시는 인상 깊습니다. 또한, 촉에 그나마 위로(?)가 되는 일은 촉을 무너뜨린 위도, 촉과 동맹인 오도 천하를 얻지 못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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