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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 영화에 빠지다 독서

한국 영상 자료원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 Korean Classic Film'에 들어가서 고전 영화들을 보는 게 요즈음 제가 즐기는 취미입니다. 한국 영상 자료원은 달마다 해당 채널에 영화를 한두 편씩 올리는데, 이번 달 또는 다음 달에는 어떤 영화가 올라올지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고전 영화가 지닌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옛날에 제목만 들었거나 제목마저 듣지 못한 작품들을 이제 발품을 팔지 않아도 집에서 손쉽게 찾아보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어느 '자유 부인'이 식민지 시기에 방황과 좌절을 겪는 모습을 나타낸 <미몽>(1936), 원작인 희곡 「동승」을 뛰어넘는 수작인 <마음의 고향>(1949), 오늘날과 사뭇 다른 옛 서울 풍경을 유쾌하게 보여 주는 <서울의 휴일>(1956), '아버지의 얼굴'을 가진 배우 김승호(金勝鎬, 1918~1968) 씨가 부성애를 가슴 저리게 드러낸 <마부>(1961), 싱거운 웃음 너머에서 "들립니까?"라는 절규가 대학 교정을 울리던 <바보들의 행진>(1975), 화면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불화나 다름없던 <만다라>(1981) 등을 만난 일은 무척 즐거웠습니다. 또한, 그 속에 담긴 옛사람들의 삶을 엿보는 일도 재밋거리였습니다. 예컨대 1980년대 초 서울 변두리 빈민촌을 배경으로 삼은 <꼬방동네 사람들>(1982)은 당시 생활상을 그린 풍속도라고 할 만하지요.

이렇게 한국 고전 영화를 열심히 보다 보니까 한국 고전 영화를 다룬 책에도 관심이 자연스레 생겼습니다. 그래서 읽은 책이 영화 잡지 『씨네21』에서 편집장으로 일하고, 한국 영상 자료원 원장을 지낸 조선희 씨가 2009년에 쓴 『클래식 중독』(관련 정보)입니다. 이 책은 '새것보다 짜릿한 한국 고전영화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멀리는 1934년 작 <청춘의 십자로>에서, 가까이는 2003년 작 <바람난 가족>까지 한국 영화사를 아로새긴 여러 작품과 얽힌 일화를 소개하였습니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 영화인 <청춘의 십자로> 원본 필름을 찾아낸 사연(관련 글), 디지털 복원 작업 1순위 대상으로 생각한 걸작 <오발탄>(1961)이 후보로 밀려난 사정, 상영 시간이 두 시간이 넘어갔음에도 검열로 수십 분이 잘려 나간 <최후의 증인>(1980)을 개봉한 지 거의 30년 만인 지난 2009년에 감독판으로 복원해 공개한 연유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글쓴이가 쌓은 이력 덕분에 알았습니다. 다행히 <오발탄>은 그 뒤에 디지털 복원 작업이 이루어져서 영어 자막을 지워 낸 말끔한 고화질 영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에 실린 영화감독들 이야기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글쓴이는 <바람 불어 좋은 날>(1980)과 <바보선언>(1983)으로 1980년대 한국 영화를 이끌어 나가다가 졸작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몰락한 이장호(李長鎬, 1945~) 감독을 가리켜 "종교의 피안에서 자연인 이장호는 마음의 풍파를 잠재우고 평안을 얻었겠으나 영화감독 이장호는 예술적 긴장이 무너지면서 당대와의 접점을 놓쳐버린 듯하다"라고 촌평하면서 씁쓸함을 감추지 않습니다. 반면에 구세대가 전멸한 충무로에서 100편이 넘는 영화를 찍으면서 거장이 된 임권택(林權澤, 1934~) 감독이 살아남은 비결은 "자신의 지난 작품들, 그 성취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심지어 거의 생각에서 지워버린다는 것, 그것이 그가 교만에 발목 잡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느냐고 말합니다.

김기영 감독의 1960년 작 <하녀>의 한 장면(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또한, '영화 천재'로 불릴 만큼 재능을 타고났으나, 대중의 기억에서 빠르게 잊힌 이만희(李晩熙, 1931~1975) 감독은 "주어진 재능을 거침없이 꽃피우고 보람차게 열매 맺은 행복한 천재가 아니라 시대를 잘 못 만나 영혼과 육신을 일찍이 소진해 버린 불행한 미완의 천재"였다고 평가하면서 그가 검열 제도라는 '악마'에게 늘 쫓겨야 했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칩니다. 이만희 감독 못지않은 천재인 하길종(河吉鍾, 1941~1979) 감독은 어떤가요? 이만희 감독와 마찬가지로 '악마'에게 쫓기던 처지인 그는 <화분>(1972)과 <수절>(1973)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자신감을 잃습니다. 그러다가 <바보들의 행진>이 크게 흥행하자 거기에서 대중과 소통하는 통로를 발견했는지 <속 별들의 고향>(1978), <병태와 영자>(1979) 같이 동어 반복인 범작을 만듭니다. 조선희 씨는 "하길종의 필모그래피는 영화학도의 패기가 살아 있던 <화분>에서 출발해 대중의 눈높이로 내려오는 과정"으로 감독 스스로 '바보 병태'가 되기로 기꺼이 작정했다고 설명합니다.

1979년, 하길종 감독이 서른아홉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영화들이 너무 창피해서 폭음한 결과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나는 하길종 감독이 '스트레스死' 했다고 본다. 사춘기 소년소녀들처럼, 생동하는 내부 에너지와 억압적인 외부 에너지의 충돌에서 오는 일종의 환경 스트레스다. 카피라이터 이만재 씨는 추모 글에서 그를 "한 마리 분노한 사슴"으로 표현했는데, 좁은 닭장 안에 갇힌 사슴이라고 할까. 꿈은 너무 멀리 높은 데 있었고 영화계 인프라는 너무 부실했고 사회의 공기는 너무 숨 막혔다. 대학 2학년 때 4.19를 현장에서 겪었고 하필 1960년대 후반 미국 유학을 했다는 것이 그에게는 불행이었다.

검열의 시대에 억눌린 이는 이만희 감독과 하길종 감독만이 아니었습니다. 사전 검열과 사후 검열을 거치면서 숱한 영화가 뒤집어지고 망가졌습니다. 영화계 원로인 김수용(金洙容, 1929~) 감독은 얼마 전에 "만약 검열이 없었다면 한국영화가 지금보다 30~50년은 더 앞질러, 봉준호가 50년 전에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1960년대에 황금기를 누리면서 많은 명작을 남긴 한국 영화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암흑기를 맞이한 까닭이 검열 제도 탓이라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제 검열 제도는 사라졌으나, 그것이 한국 영화사에 입힌 상처는 옛 영화에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그 상처를 살펴보는 일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영화 관련 도서는 영화만큼 재미있지 않은 때가 적잖아서 당혹스러운데, 『클래식 중독』은 재미있게 읽힙니다. 책 속에서 글쓴이가 언급한 영화들을 아직 절반도 채 못 봤는데, 언젠가 이 작품들을 모두 보게 된다면, 『클래식 중독』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때까지도 저는 한국 고전 영화에 빠져 지내겠지요. 즐거운 중독입니다.

덧글

  • 이글루스 알리미 2020/01/06 08:04 # 답글

    안녕하세요, 이글루스입니다.

    회원님의 소중한 포스팅이 01월 06일 줌(http://zum.com) 메인의 [컬처] 영역에 게재되었습니다.

    줌 메인 게재를 축하드리며, zum 메인 페이지 > 뉴스 하단의 컬처탭에 게재된 회원님의 포스팅을 확인해 보세요.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解明 2020/01/06 23:40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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