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明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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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이 시를 쓰고 싶었을 때 단상

신경림 시인의 모습(경향신문)

내가 시를 한 십여 년 안 썼다고 하지만 무척 시를 쓰고 싶을 때 가 있었습니다. 속에서 뭔가 북받쳐올라 시를 안 쓰면 못 견딜 때가 있었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돈벌이가 없으니까 양귀비를 재배했습니다. 그걸 집에서 조금씩 하면 상당한 돈벌이가 되었습니다. 그걸 수집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내가 수집하러 다니는 사람의 길 안내를 맡은 일이 있습니다. 길 안내를 해주면 돈을 주었습니다. 원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성미인데다, 공짜로 먹여 주고 돈까지 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술을 좋아해서 주막에 들르면 일단 술 먼저 먹는 걸 생애 제일의 뜻으로 삼고 있을 때여서 잔뜩 취해서 잤습니다. 눈이 며칠 동안 퍼부어 길을 다닐 수가 없을 정도가 되어, 한 주막에서 사흘 동안 매일 술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 그 집 주인이라는 사람은 남로당이라 총 맞아 죽었고, 여자가 혼자 술집을 하는데 농담을 잘하고 걸쭉한 소리를 잘했습니다. 매일같이 동무해서 술 먹고 그랬는데,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보니 눈이 다 그쳤어요. 울타리가 없는 시골 뒷간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하늘에 주먹만한 별들이 가득 달려 있어요. 한참 밑에는 공사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공사장에서 불빛이 비쳐요. 마음이 얼마나 슬픈지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필기도구를 안 가지고 다녔으니까 일단 속으로 시를 썼지요. 그것을 나중에 조금 정리해서 발표한 게 「눈길」이라는 시입니다. 말하자면 시를 쓰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십 년 동안에 쓴 시가 그거하고 「그날」이라는 시입니다.
- 박경리 외 16인의 『나의 문학 이야기』에서

지난해에 신경림 시인의 시집 『농무』 서평을 쓰면서 읽은 「눈길」은 요령부득한 시였습니다. 신경림 시인이 1970년에 발표한 시 「눈길」은 길이가 짧았지만, 앞뒤 상황이 잘 이어지지 않아서 무슨 소리인지 얼른 알아차리기 어려웠습니다. 시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 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
억울하고 어리석게 죽은
빛 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음탕한 농짓거리로 아낙을 웃기면
바람은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 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이제 남은 것은 힘없는 두 주먹뿐
수제비국 한 사발로 배를 채울 때
아낙은 신세 타령을 늘어 놓고
우리는 미친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온다

시 옆 여백에 물음표로 끝나는 적바림을 여럿 남긴 것을 보면, 서평을 쓸 무렵에 「눈길」은 제게 불가해한 작품이었나 봅니다. 시적 화자가 아편을 사러 가는 까닭도, 주막 주인은 왜 죽었는지도, 주막 아낙이 늘어놓는 넋두리에 어떤 사연이 담겼는지도 모르니까 작품에서 느껴지는 정서로 그 뜻을 짐작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나의 문학 이야기』라는 책에 실린 신경림 시인의 강연록 「생명력 있는 시를 쓰려면」을 뒤늦게 읽으면서 「눈길」이 어떤 시인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경림 시인이 경험담을 시로 풀어내면서 그 속에 감춰 둔 이야기가 시보다 더 시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시인 마음에 슬픔을 느끼게 한 별빛과 불빛이 정작 작품에 나오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지 궁금합니다. 별빛과 불빛은 감정을 유발한 촉매였을 뿐이라서 그랬을까요? 읽으면 읽을수록 알 듯 말 듯한 게 시인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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