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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어 문법 용어 언어

'임, 엇, 움' 등 고유어 문법 용어를 사용한 주시경의 『국어 문법』 원고(국가문화유산포털)

언어민족주의자들은 우선 자신들의 한국어 문법에서 이 싸움을 실천했다. 그래서 주시경은 자신의 기난갈(품사론)에서 한국어 품사를 임(명사), 엇(형용사), 움(동사), 겻(조사), 잇(접속사), 언(관형사), 억(부사), 놀(감탄사), 끗(종지사) 등 아홉으로 나누었고, 최현배는 자신의 씨갈(품사론)에서 한국어 품사를 이름씨(명사), 대이름씨(대명사), 셈씨(수사), 움직씨(동사), 그림씨(형용사), 잡음씨(지정사), 매김씨(관형사), 어찌씨(부사), 느낌씨(감동사), 토씨(조시) 등 열로 나누었다. 이들 두 스승보다 덜 급진적이라고 평가되는 허웅도 선배들로부터 물려받거나 자신이 창안한 고유어 용어들로 자신의 저서를 채웠다.
-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에서

1983년에 초판이 나온 허웅(許雄, 1918~2004) 선생의 『국어학 - 우리말의 오늘·어제』를 펼치면, 제가 가진 중판에는 '언어학 용어 맞댐표'를 책 뒤에 덧붙였습니다. 이 표는 책 속에 숱하게 나오는 고유어 문법 용어를 한자어 문법 용어로 바꾸면 어떻게 되는지 가나다순으로 비교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용어를 꼽아 보면, '갈이소리'는 '마찰음', '내리닮음'은 '순행동화'를, '맺음씨끝'은 '어미'를, '옹근 이름씨'는 '완전명사'를 '풀이조각'은 '서술부'를 가리킵니다.

'거센소리(격음)'나 '안울림소리(무성음)' 같은 일부 용어는 학교 문법에서도 쓰일 만큼 정착하였지만, 고유어 문법 용어가 한자어 문법 용어를 갈음하는 데에는 대부분 실패했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허웅 선생이 맞댐표 앞에 "쉬운 우리 토박이말로 된 학술용어가 알기 어렵다는 사람들을 위하여, 글쓴이의 다음 책에 쓰인 토박이 용어를 한자말과 맞댄 표를 만든다"라고 밝혔다시피 사람들이 쉽게 여겨야 할 고유어 문법 용어가 오히려 한자어 문법 용어보다 눈에 설고 귀에 설어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방패여린뼈'가 '갑상연골'인지 얼른 알아챌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모르긴 몰라도 얼마 되지 않겠지요. 그만큼 우리가 한자어에 익숙하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한자어 문법 용어를 거의 직역하다시피 한 고유어 문법 용어가 많다는 점도 문제이지만, 인용문에 나오듯이 '임, 엇, 움, 겻, 잇, 언, 억, 놀, 끗'처럼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선생이 만든 용어는 우리말 조어법에 어긋나는 게 적잖아서 언중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점도 문제였습니다. 우리말 사랑을 실천하려는 '선의'가 언중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으니 얄궂은 일입니다. 고유어 문법 용어가 정착하는 데 실패한 사례는 이른바 언어 순화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우리에게 일깨운다고 평가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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