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明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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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민족주의를 넘어서 어문 민주주의로 독서

현행 한글 맞춤법은 제1장 제1항에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라고 하여서 그 대원칙을 밝혔습니다. 이 원칙을 따라서 '꽃'이라는 단어를 '이, 을, 에' 같은 조사와 함께 적는다면, 우리는 '꼬치, 꼬츨, 꼬체'가 아니라 '꽃이, 꽃을, 꽃에'라고 적어야 합니다. 또 '꽃'은 '꽃이'일 때는 [꼬ㅊ]으로, '꽃만'일 때는 [꼰]으로, '꽃과'일 때는 [꼳]으로 소리 나지만, 그 형태를 바꾸지 않고서 한결같이 '꽃'으로 씁니다. 이것은 한글 맞춤법이 표음주의보다 표의주의 또는 형태주의에 더 기울어졌음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표음주의는 맞춤법에서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형태주의는 맞춤법에서 단어를 어법에 맞도록 적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나저나 형태주의를 맞춤법 원칙으로 삼은 때는 언제일까요?

지금과 달리 전근대에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식은 표음주의에 더 가까웠습니다. 기실 근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 사이에 번역된 성경들이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어서 근대 초기에 맞춤법이 어떠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하지요. 하지만 국문 연구소(대한 제국이 1907년에 학부 안에 설치한 국문 연구 기관)에서 연구 위원으로 일한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선생이 형태주의를 내세우면서 지석영(池錫永)을 제외한 다른 위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자 수백 년 동안 이어진 표기 관습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리고 주시경 선생이 가르친 제자들이 주축을 이룬 조선어 학회가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면서 형태주의 표기법은 대세로 자리 잡습니다.

조선 총독부가 1912년에 공포한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이 국문 연구소에서 작성한 「국문 연구 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을 부정하고서 표음주의 표기법을 지향하였음에도(관련 기사)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조선어 학회를 부르주아 어문 운동 단체로 규정한 카프(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 속한 문학가들조차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지지하였는데, 그만큼 대중은 조선어 학회를 미덥게 여겼습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국가 기관이나 다름없는 조선 총독부를 대신하여 조선어 학회가 일부 조선어 정책을 이끌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은 조선어 학회 사건(1942)과 더불어 조선어 학회가 역사적 정당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는데, 현행 한글 맞춤법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기본으로 한 것만 보더라도 조선어 학회의 높은 위상을 알 만합니다.

그런데 해방 이후에 형태주의 표기법을 표음주의 표기법으로 되돌리려고 꾀한 이가 있어서 눈길을 끕니다. 그 장본인은 바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1875~1965)입니다. 1948년 10월 9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서 처음으로 맞이한 한글날에 발표한 대국민 담화에서 이승만은 나중에 벌어질 일을 언질 주겠다는 듯이 "우리 국문을 쓰는 데 한글이라는 방식으로 순편(順便)한 말을 불편케 하든지 속기(速記)할 수 있는 것을 더디게 만들어서 획과 음을 중첩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리 한글 초대 원칙이라 할지라도 이 글은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니 이 점에 깊이 재고를 요하여 여러 가지로 교정을 하여서 우리글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를 부탁하는 바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활동한 까닭에 옛날 '성경 맞춤법'이 낯익은 이승만은 조선어 학회(이 무렵에 '한글 학회'로 이름을 바꿨지만)의 한글 맞춤법이 못마땅하였나 봅니다. 이태 뒤에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한글 맞춤법을 '개혁'하겠다는 뜻을 곧바로 이루지 못하였으나, 이승만은 1954년에 「한글 간소화 방안」을 공포하면서 큰 논란을 빚었습니다. 이른바 한글 간소화 파동이었습니다.

한글 간소화 파동을 일으킨 이승만 전 대통령(한겨레)

「한글 간소화 방안」은 "받침은 끝소리에 발음되는 'ㄱ, ㄴ, ㄹ, ㅁ, ㅂ, ㅅ, ㅇ, ㄺ, ㄻ, ㄼ' 10개만을 허용한다"거나 "명사나 어간이 다른 말과 어울려서 딴 독립된 말이 되거나 뜻이 변할 때에 그 어원을 밝히어 적지 아니한다"는 원칙 따위에서 드러나듯이 한글 맞춤법을 표음주의 표기법으로 고치겠다는 속셈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한글 간소화 원칙대로 우리말을 글로 쓴다면, '믿다'는 '밋다'로, '갚다'는 '갑다'로, '많다'는 '만타'로 적어야 했습니다. 주시경 선생의 제자인 최현배(崔鉉培) 선생을 비롯하여 여러 분야 인사들이 반대하였지만, 이승만은 고집불통이었습니다. 때로는 색깔론을 꺼내고, 때로는 '세종 대왕의 뜻'을 들먹이면서 한글 간소화를 거세게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나 언론과 시민들마저 한글 간소화에 반대하자 이승만은 1955년 9월 15일, "지금 여러 가지 바쁜 때에 이것을 가지고 이 이상 더 문제 삼지 않겠고, 민중들의 원하는 대로 하도록 자유에 부치고자 하는 바"라고 말하면서 한 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몇 년에 걸쳐 일어난 한글 간소화 파동은 4·19 혁명을 미리 보는 듯한 결말이 나면서 끝났습니다.

물론 한글 간소화 파동은 어려운 것을 쉽게 만들며,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만들겠다는 이승만의 '선의'에 말미암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말과 우리글을 부려 쓰는 언중은 그 '선의'를 정작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형태주의 표기법이 표음주의 표기법보다 배우기 어려웠지만, 언중은 끝까지 형태주의 표기법을 감쌌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러나 이승만이 형태주의 표기법이 역사적인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은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그는 20세기 초의 상황 인식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해방 이후 정립된 한 국가의 표기법을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관습을 존중하고 대중들에게 편리한 표기법을 만들기 위해 개혁을 추진했겠지만, 이승만이 주도한 철자 개혁이 실패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중의 국어의식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였다.

국어학자 최경봉 교수는 2012년에 쓴 『한글민주주의』(관련 정보)에서 이승만이 실패한 원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여 한글 간소화 파동은 어문 정책에서 언중을 고려하고, 민주주의 관점을 지켜야 함을 보여 준 사건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한글 간소화 파동과 비슷한 일이 앞으로 생기지 않을까요? 이승만이야 둘째가라면 서러운 독재자였으니까 어문 정책도 제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지만, 오늘날 민주 공화국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펼치는 국어 정책과 국어 의식은 어떠한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 체제가 민주화한 만큼 국어 정책과 국어 의식도 민주화하였다고 말한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말하기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말에서 외래어를 솎아 내야 한다고 너나없이 목소리를 높일 만치 어문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 어문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아직 멀어 보입니다.

한글과 우리말을 한데 묶어 생각하며 강화된 어문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이상적인 국어정책은 외래적 요소가 배제된 순수한 국어를 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속성상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어문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국어정책에서 민주주주의적 원칙을 지키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문민족주의를 강화하여 이루어낸 성과가 찬란했음에도 오늘날 이를 재고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왠지 어울리지 않은 듯싶은 '한글'과 '민주주의'를 잇댄 제목을 통하여 최경봉 교수는 우리가 어문 민족주의를 넘어서 어문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글민주주의』에서 최 교수는 한글 없는 대한민국을 상상해 보기도 하며, 표준어를 정립해야 우리말이 발전하는지 묻기도 하면서 독자들의 사고를 자극합니다. 또 한글을 다른 나라에 사는 소수 민족에 '수출'하는 게 바람직한지, 거기에서 한글은 우수하거나 우월하다는 강박감이 나타나는 게 아닌지 따져 봅니다. 모든 논의가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글민주주의』는 우리말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 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문 민족주의를 넘어선 우리말은 그리고 한글은 어떤 모습일지 머릿속에 그려 보는 것은 어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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