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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 학회 사건의 의미와 영화 <말모이> 언어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들이 1946년에 찍은 사진(한겨레)

일본의 언어정책이 변화를 맞은 것은 전쟁의 확대 과정과 맞물려 있다. 전선의 확장은 필연적으로 권력의 파쇼화를 불러왔고,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식민 지배는 더욱 폭력화되었다. 교육 현장에서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전 사회에서 일본어 상용을 강요한 것도 전시동원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동화정책의 일환이었다. 1920년대 들어 문화통치를 내세우며 민족 문화운동을 허용하던 때와는 완전히 상황이 변했다. 수양동우회 사건(1937), 흥업구락부 사건(1938),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조선어 신문의 폐간 조치(1940) 등을 볼 때, 1942년에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은 사실상 예견된 것이었다.

일본 경찰은 조선어학회를 학술단체를 가장하여 국체(國體) 변혁을 도모한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했다. 그리고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에게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내란죄로 기소했다. 그러나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합법적인 틀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문제로 삼은 조선어사전은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통과하여 출판을 허가받은 것이었다. 내란죄의 근거는 오직 조선 독립을 희망한 마음이었다. 일본 법원은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하며, "어문운동은 문화적 민족운동임과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 깊은 꾀와 먼 장래를 내다보는 생각)를 함축하는 민족 독립운동"이라 했다. 조선 독립을 향한 조선어학회 사람들의 심모원려를 읽어낸 것은 틀렷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심증에만 근거한 기소와 이를 인정한 판결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조선어학회 사건은 '조선어사전의 편찬 금지'보다는 '전시동원 체제의 강화'에 방점을 두고 기획한 사건으로 봐야 할 것이다. 조선어 정리사업과 같은 조직적인 문화활동은 그 자체가 민족의식을 일깨울 수 있는 활동이었기 때문에, 전시동원 체제를 강화하려는 일본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는 조선어학회를 내란죄로 몰아 폭력적으로 해체한 것은 민족운동 세력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을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의 후유증은 해방 후에야 분명해진다. 해방 후 우리말의 역할은 늘고 그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이에 걸맞은 우리말 사전에 대한 요구도 급증했다. 그러나 되찾은 원고를 수정하고 다듬는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어사전의 출판은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우리말 문화의 기반이 더디게 조성되면서 사회 발전 또한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 최경봉의 『우리말의 탄생 -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에서

올해 1월에 영화 <말모이>가 개봉하면서 작품에서 다룬 조선어 학회 사건이 다시 주목을 받은 바 있습니다. 물론 영화에서 묘사한 조선어 학회 사건은 사실과 사뭇 달라서 영화를 관람하면서 불만스러운 부분이 컸습니다. 조선어 학회 사건을 있는 그대로 나타냈어도 극적으로 보일 텐데, 굳이 없는 일을 꾸며 내면서 영화를 만들 까닭이 있었을까 싶었습니다. 특히 잃어버린 사전 원고를 찾는 과정이 그러했지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실존 인물들이 나오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나중에 조선어 학회 사건을 사실에 따라 그려서 『큰사전』 편찬의 의의를 밝힐 만한 작품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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