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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정부의 통합은 민주적으로 역사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위키백과)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임시정부의 통합 과정을 살펴보자. 임시정부 가운데 실체를 가지고 있는 두 지역의 임시정부, 그러니까 상해와 연해주가 통합의 중심이 되었다. 먼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는 원세훈을 파견하여 대한국민의회와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을 합치고 정부를 연해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연해주에 정부의 배후가 될 교포가 많고 우리나라 본토와 가깝다는 것이 근거였다. 하지만 상해 쪽 인사들은 그 제안을 거부했다. 연해주는 일제의 간섭을 피하기 어렵고, 다른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는 데 상해가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통합에 대한 의지는 있지만 진전이 없는 답보 상태에서 안창호가 등장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 겸 내무총장인 안창호는 5월 말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에서 지원 받은 약간의 자금을 들고 상해에 왔다. 6월에 취임한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대표성과 역량을 강화해 독립운동을 지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연해주와 미주의 힘도 모아야 했다. 안창호는 자연스럽게 임시정부 통합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두 정부는 서로 견해가 달랐다. 또 비교적 안정적인 미주의 동포 사이에서 영향력이 강했던 이승만의 거취도 문제였다. 이승만은 한성정부에서 추대한 집정관총재직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대통령'이라고 주장하면서 한성정부에 정통성이 있다고 했다. 한 달 동안 문제들을 살펴본 안창호는 해결점을 찾아냈다.

"러시아 연해주·중국·미국 각지로부터 정식 의정원을 소집하여 거기서 주권자 3인을 택하여 그 셋이 일곱 차관을 뽑아 의정원에 통과시키려고 합니다."
- 《안도산전서》

안창호는 먼저 실질적인 동포 사회의 후원과 조직이 있는 지역에서 명망 있는 인사를 임시정부의 핵심에 두어 조직을 구성하자고 했다. 상해의 안창호, 연해주의 이동휘, 미주의 이승만이 모인다면 통합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안창호와 이동휘가 모이는 것은 상해와 연해주 두 정부가 손을 잡는 것과 같으니 실질적인 통합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이승만을 끌어들여야 했다. 당시 이승만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일컬으며 미주 한인사회의 자금을 독점하고자 했다. 미주의 자금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이승만이 임시정부에 참여할 명분을 제공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까지 고민한 안창호는 마침내 '한성정부' 카드를 꺼내들었다.

두 세력, 그러니까 상해와 연해주의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한성정부의 이름을 계승해 통합하자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상해와 연해주 둘 다 기득권을 포기하게 되니 통합의 명분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승만과 이동휘로부터 새로운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동의를 구할 수 있었다.

통합 논의가 끝맺음되자 상해 임시정부는 한성정부를 참고하여 임시헌법 개정안과 정부 개조안을 통과시켰다. 곧이어 1차 개헌을 한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9월 11일 공포했다. 전문과 8개 장, 58개 조문으로 이뤄진 임시헌법은 선언 수준이던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내용을 제대로 된 법조문으로 정리했다. 임시헌법에서 정한 정부 조직의 가장 큰 변화는 '국무총리제'에서 '대통령제'로 바뀐 것이었다. 임시정부 통합 과정에서 이승만을 끌어들이기 위해 나온 고육지책이었다.

새로운 통합 임시정부 성립이 눈앞에 왔는데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연해주에서 온 이동휘·문창범 등 인사들이 상해 임시정부가 내각만 해산하고 임시의정원은 그대로 둔 것을 비판했다.

또 임시의정원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자 일부 인사가 이승만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며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승만이 이전에 주장했던 '위임통치론'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1919년 2월 25일, 미국 대통령에게 청원문을 보내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두도록 미국이 주선해달라고 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신채호는 다음과 같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차라리 나 죽이구려! 미국에 편안히 들어앉아 위임통치나 부탁하는 이승만을 어떻게 수반으로 모신단 말이오? 따지고 보면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 아니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란 말이오."

결국 신채호는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가버렸다. 아슬아슬한 순간을 겪었지만 11월 3일 이동휘가 국무총리에 취임하며 통합 임시정부의 모습은 갖춰졌다.

(중략) 막 출발한 통합 임시정부의 과제는 분명했다. 독립전쟁을 하겠다는 점에서 전시정부와 비슷하지만 실질적인 군대를 갖지 못했고, 국외에 수립됐다는 점에서 망명정부와 비슷하지만 빼앗긴 나라와 찾아야 할 나라의 모습이 달랐다. 가진 것은 없지만 해야 할 일은 많은 임시정부였다.
- 박광일의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에서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한성 정부, 상하이 임시 정부, 대한 국민 의회가 통합하는 과정을 간략하게 서술했기에 거기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힘든 고비가 많았는지 짐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인용문에 나오듯이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이 가운데에서 애쓰지 않았다면, 통합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출범하기 어려웠겠지요. 이러한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민주정이 무엇인지 느끼는 일은 그야말로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이었다고 할 만합니다.

덧글

  • 2019/09/13 11:39 # 삭제 답글

    이승만이 완고한 모습을 보여준게 아쉽군요. 조금 더 유연했으면 더 나았을텐데

    안창호선생이 중간에서 합의점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실행하는 모습이 민주주의 시민이 본받을 모습이겠죠
  • 解明 2019/09/13 12:54 #

    이승만은 평생 그렇게 살다가 간 사람이라서 그냥 이승만이 이승만답게 행동했다고 여겨야 할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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