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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성 영화 시대의 조선 영화사 살펴보기 독서

1927년에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영화 <재즈 싱어(The Jazz Singer)>가 미국에서 개봉하면서 무성 영화 시대가 막을 내렸지만, 조선 영화는 무성 영화 시대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발성 영화(유성 영화)에 이미 길들어진 관객들이 입만 벙긋거릴 뿐인 조선 영화를 볼거리로 여길 리 없었습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식민지 조선의 영화계가 침체에 허덕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했겠지요. 미국 할리우드와 유럽 여러 나라에서 들여온 영화들에 밀린 조선 영화가 흥행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고, 이러한 여건을 반영하듯 1932년부터 1934년까지 3년 동안 나온 영화가 겨우 두세 편에 지나지 않을 만큼 적었습니다. 한국 영화사의 전설이 된 작품 <아리랑>을 감독한 나운규(羅雲奎)가 세운 나운규프로덕션를 비롯하여 많은 제작사가 덧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다가 1935년에 최초의 조선어 발성 영화인 <춘향전>이 상영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처음으로 시도한 토키(talkie) 영화였기에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있었으나, <춘향전>은 관객몰이에 성공하면서 조선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그로부터 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조선 영화는 빠르게 바뀝니다. 무성 영화 시대에 '별'처럼 반짝이던 변사는 어느새 빛을 잃고서 한물간 직업이 된 채로 도시 변두리나 농촌을 떠돌았으며, '조선의 애인'으로 불리면서 큰 인기를 끌던 신일선(申一仙)은 문예봉(文藝峰)과 김신재(金信哉) 같은 후배들에게 밀려났습니다.

최초의 조선어 유성 영화 <춘향전>의 한 장면(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반면에 새 시대를 맞아서 영화학을 제대로 배운 신진 영화인들은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청춘비가(青春悲歌)>로 데뷔한 뒤에 조선으로 돌아와서 <춘풍>을 연출한 박기채(朴基采, 1907~?)는 "영화를 제작하는 고상한 예술가로서, 더욱 수천수만의 교부(敎父)로서 인격이 완성된 영화인이라야 한다"라고 주장했는데, 그가 언급한 '인격'은 영화 제작에 임하는 진지한 태도나 관객 교화에 힘쓰는 일을 가리켰습니다. 박기채는 인격과 양심을 새삼 강조하면서 구세대인 무성 영화 시대 영화인들이 영화인으로서 인격과 양심이 없었기에 조선 영화가 허약한 상태로 머물 수밖에 없었음을 비판하고자 했습니다.

문제는 발성 영화는 무성 영화를 만들 때보다 제작비를 몇 배 더 들여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은 식민지라는 처지에 놓인 탓에 자본도 영세하고 기술도 부족한 조선 영화계가 좀처럼 풀기 어려운 숙제였습니다. '영화 기업화' 논의가 발성 영화 시대에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는 게 마땅하였습니다.

신진 영화인들이 주도했던 조선 영화의 기업화론은 외국 영화 수입에 대한 일본과 조선총독부의 강력한 통제 정책을 배경으로 더욱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영화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영화가 국가의 입장에서 도덕적·정치적·경제적 관심 대상으로 포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발성 영화 제작에 즈음해 외국 영화의 수입을 통제하는 조치가 취해졌다는 것은 소리의 도입 이후 영화가 국가 산업화되었으며, 이것이 내셔널리즘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관객들은 외국어보다 자국의 언어를 듣고 싶어 했다. 발성 영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영화를 제작하는 국가마다 자국어 영화의 수요가 급증했고, 그에 따라 침체되어 있던 자국 영화의 제작이 활기를 되찾아갔다. 각국은 자국 영화의 제작과 배급의 안정성을 꾀하고자 외국 영화 상영을 제한하는, 보호 무역 성격의 법적 장치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영화 제작 편수에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했던 일본이 이러한 추세를 놓칠 리 없었다.

1941년에 개봉한 영화 <반도의 봄(半島の春)>은 영화 기업화 논의가 이루어지던 당시 상황을 잘 보여 줍니다(관련 글). 극중극인 <춘향전>이 첫 장면을 장식하는 이 작품은 식민지 시기 영화 촬영 현장을 고스란히 드러내서 눈길을 끕니다. <반도의 봄>에서 극중극 <춘향전>은 제작비가 바닥난 데다가 주연을 맡은 배우마저 도중하차하면서 촬영이 중단되지만, 실업가와 영화인 등이 손잡고 반도영화주식회사를 세우면서 갈등을 해결합니다. 뒤에서 든든하게 지원하는 회사가 생기자 제작진은 <춘향전>을 완성해서 흥행에 성공합니다. 또 남녀 주인공은 '조선 영화인의 사절'로서 일본에 견학하러 가면서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요.


그런데 영화 기업화 논의가 낳았다고 할 만한 이 작품에서 반도영화주식회사 사장은 발대식을 열면서 '나라(일본 제국)'가 중대 시국에 직면했다면서 내선일체의 원칙과 황국 신민의 책임을 강조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연설합니다. 이때 사장이 '예술적 양심'을 함부로 지껄이는 걸 듣노라면, 왠지 박기채가 '인격'을 말하던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식민지 조선의 신진 영화인들이 일본 제국에 '협력'하여 국책 영화를 만들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짐작할 만한 장면이라고 해야 할까요? 실제로 박기채는 친일 성향이 짙은 <나는 간다(今ど我は行く)>와 <조선해협(朝鮮海峽)>을 1942년과 1943년에 잇따라 내놓아서 조선인 젊은이들에게 지원병이 되라고 부추겼습니다. 불행하게도 영화계에 몸담은 조선 사람들이 이야기한 '인격'과 '양심'은 전쟁 범죄에 저항하는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한국 영화사를 연구하는 이화진 교수는 『조선 영화 - 소리의 도입에서 친일 영화까지』(관련 정보)에서 발성 영화 시대를 맞이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친일로 일그러진 조선 영화 역사를 살펴보면서 식민지 시기에만 한정되지 않는 "영화와 국가의 달콤한 동반자적 관계"를 반성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책은 <반도의 봄>이 발견되어서 일반에 공개되기에 앞서서 쓰였지만, 몇 년 전에 정부가 영화인도 섞인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로 나눠서 다스리려고 한 사건을 생각나게 해서 얼넘기기가 힘든 대목입니다. 또한, 이 교수는 "문화 전쟁에서 한류의 확산에만 주력하는 한국의 모습은 할리우드 영화 공세를 펼쳐온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와 얼마나 다른지"도 묻습니다. 2012년 이후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가 해마다 나오고, 국제 영화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만치 영화 강국이 된 오늘날에도 생각해 볼 만한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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