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明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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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역사학의 등장과 활동⑵ 역사

한국 정신문화 연구원에서 개최한 학술회의 풍경(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

전두환의 제5공화국 출범 초인 1981년 11월 26일~27일 국회 문공위원회에서는 국사 교과서에 대한 공청회가 열렸다. 안호상 등의 청원에 따른 것이었다. 국회 문공위원회에서는 청원의 주체인 안호상(국사찾기협의회 회장), 박시인(서울대 영어영문학), 임승국(한국정사학회 회장) 등을 출석시키는 한편, 김원용(서울대 고고미술사학), 김철준(서울대 국사학), 이기백(서강대 사학) 등 역사학계의 대표적인 학자들 또한 출석시켜 양자 토론을 진행시켰다.

안호상 등이 주장한 바는 다음과 같았다. ① 국사 교과서에서 고조선 역사가 일본인들에 의해 1천 년 이상 없어진 것을 인정하여 되찾지 않고 있다는 것, ② 단군과 기자는 실존 인물이며 영토가 중국 베이징까지 뻗어 있었다는 것, ③ 왕검성은 중국 랴오닝서(遼寧省)에 있었으며 낙랑군은 베이징 지역에 있었다는 것, ④ 백제는 3~7세기 베이징에서 상하이까지 중국 동해안을 통치하였다는 것, ⑤ 통일신라의 국경은 한때 베이징이었다는 것, ⑥ 고구려·백제·신라가 일본 문화를 건설했다는 것, ⑦ 여진도 우리의 종족이라는 것 등이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식민사관은 이미 많이 극복되었으며, 교과서 내용은 사실에 충실한 것이라 반박하였다. 또한 청원인 측이 근거로 제시한 사료들은 대개 신빙성이 떨어지거나 한문 해석에 오류가 있었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청원인 측이 위험한 사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일본의 우월성을 조작한 황국 사관이 결국 일본의 패망을 가져온 원인이라는 것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이틀에 걸친 공청회에서 과연 어느 쪽이 이겼다고 할 수 있을까. 공청회를 지켜본 언론인들은 대체로 역사학자들 쪽의 주장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날의 공청회는 쌍방 주장의 논거 면에서 청원인 측보다 피청원인 측이 보다 조직적이며 합리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것은 청원인 측이 전문 사학자로 구성돼 있지 않은 데 근거하는 것 같았다. 첫날의 공청회를 지켜본 사람들은 일단 청원인 측의 주장이 약하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공청회를 주최한 국회의원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이들은 '재야학자'들의 주장에 훨씬 큰 호응과 지지를 보냈고, 역사학자들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공격적이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뒤이어 이기백 교수의 답변이 있었는데, 국회에서의 답변 방법이 생소하여 질문한 강기필 의원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질문한 의원의 성함을 잘 몰라 죄송하다고 전제하고 답변에 나섰다. 이에 대해 질문한 강 의원은 "여기는 국회 회의장이다. 내 이름이 여기 명패에 적혀 있고 적어도 국회의원이 발언하는데 눈이 나쁜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면만 보아도 학문에서 여러 가지로 짐작이 되는 바 있다. 이 이상은 이 교수의 명예를 생각해서 더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여러 가지 생각해주기 바란다"라고 직설적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가세하여 임재정 의원이 발언권을 얻어 김원룡 교수와 이기백 교수를 향하여 국회를 대하는 태도가 돼먹지 않았다면서 그런 태도로 역사 연구를 한다면 결과를 안 보아도 뻔하다, 이러한 자세를 고쳐주기 바란다고 훈계조로 긴 이야기를 하였다.

국회의원들의 고압적인 태도로 인해 역사학자들은 평생 처음 겪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2월 25~26일 정신문화연구원 대강당에서 <한국 상고사의 제문제>라는 주제로 큰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기존 학계에 대한 '재야학자'들의 공세가 계속 거세지자, 정신문화연구원 측에서 양쪽 인사들을 한자리에 모아 학문적으로 정리해보자는 취지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 날인 2월 26일 종합토론 때의 일이다.

이날 종합토론장에는 연단 위에 15명의 학자가, 방청석에는 8백여 명이 들어차 있었다.(…) 이때 일부 청중들은 연단 앞으로 나가 이 교수 주장은 일제 식민지 사학자 말송보화 금서룡 등의 주장을 그대로 표절한 것이다", "답변 제대로 못하면 끌어내려". "주최측은 왜 이런 학자에게 발표를 맡겼느냐"는 등 아주 심한 말을 퍼부었다.(…) 격정적인 일부 청중을 겨우 진정시켜 토론은 그런대로 진행되기는 했으나 이때에는 이미 이 교수 등 절반 가까운 교수가 자리를 빠져나갔으며 회의장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일부 청중들은 마이크를 잡고 역사학자들을 계속 성토했다.

일반적인 학술대회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또 다른 증언에 따르면 당시 방청객들은 "서로 발언하려고 마이크 쟁탈전을 벌이고, 마이크를 얻지 못한 일부 방청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의 이 교수를 향해 고성을 지르고, 일부는 단상으로 몰려가고 난장판이었다"고 전한다. 역사학계와 '재야학계'의 입장을 조율하고자 했던 애초 의도와 달리, 이 자리는 폭언과 실력 행사가 난무하는 참사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양자의 대화를 더욱 단절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 기경량의 「사이비역사학과 역사파시즘」에서

지난번에 올린 「사이비 역사학의 등장과 활동⑴」에 이어서 올립니다. 현재 역사학계의 원로급 학자들에게 '1987년 트라우마'를 겪게 한 이른바 국사 교과서 파동 사건을 서술한 부분을 인용하였습니다. 이때 당시 역사학자들은 안호상 같은 사이비 역사학자들의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논파하였으나, 사이비 역사학에 물든 국회의원과 대중에 의해 공청회와 토론회는 '참사'로 끝나고 말았지요. 이것과 비슷한 일이 몇 년 전에 되풀이하듯 일어났다는 점에서 국사 교과서 파동 사건은 옛일로만 보아 넘기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덧글

  • 존다리안 2019/01/11 08:37 # 답글

    제 5 공화국 전대갈 시기에는 정치권에서 사이비역사학이 “필요”했던 듯도 합니다.
    웃긴 건 이에 맞선 운동권도 아무래도 그 환단고기니 하는 사이비 역사학에 빠진 것 같다는 것.
  • 解明 2019/01/12 13:06 #

    "이들은 그 동안 학생과 군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끊임없이 강연회를 개최하고 책자를 보급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 자기들의 학설에 대한 상당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특히 재야학자들의 기관지처럼 되어 있던 박창암 장군이 발행하는 『자유지』가 군인들의 정훈 교재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군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상당히 컸다. 더욱이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심정적으로 재야학자의 학설에 동조하고 있던 젊은 영관급 장교들이 정부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문교부에 유형·무형으로 압력을 가해 왔다. 이러한 압력은 나에게 집중되었는데, 주로 방문 항의, 다수인을 통원한 민원 제기, 정계 인사를 통한 압력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이 가운데 5공 정부의 실력자들인 영관 장교들은 장관에게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 윤종영의 『국사교과서 파동』에서

    국사 교과서 파동 사건이 일어난 제5 공화국 당시 분위기를 읽을 만한 증언이지요.
  • 남중생 2019/01/11 13:02 # 답글

    81년 1차 토론 때는 그런대로 양측의 의견을 들어보고 더 합리적인 쪽을 따르자는 일반인식이 있었던 듯한데, 87년이 되니 입장이 확고한 국회의원 뿐 아니라 청중의 모습이 눈에 띄네요.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걸까요...?
  • 초록불 2019/01/11 14:46 #

    환단고기가 있었죠. 1985년부터 1986년에 엄청난 물량공세가 펼쳐집니다. 임승국의 <한단고기>가 1986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고... 1985년에는 <단>이최고 베스트셀러였죠.
  • 남중생 2019/01/11 16:59 #

    오,그렇군요...
    85,6년 출판시장을 이용한 선전활동의 여파로 87년의 트라우마 사건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 解明 2019/01/12 13:15 #

    저 대신에 답글을 써 주신 이문영 선생의 신작 『유사역사학 비판』에서 일반인들의 인식 변화를 보여 주는 대목이 살짝 나와서 인용해 봅니다.

    "'국사 찾기 협의회'의 이런 공격에 역사학계도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학계는 1978년 11월 23일 서대문 한국연구원에서 국사찾기협의회의 '국사찾기운동'에 대한 경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내용 중에는 『자유』지의 창간 취지인 반공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있었다. 이에 대해 『자유』 발행인인 박창암은 1978년 『자유』 12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반공이란 '사상운동'인 바 국민(민족)의 그 사상적 확신 행동은 '민족사관'에 근원하는 것이라면 공산당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유물사관을 압도하는 민족사관인 것이다. 따라서 본 『자유』지는 민족사관 확립을 위한 국사찾기운동을 기본 강령으로 삼고 있음을 재인식하라.

    이 무렵만 해도 자유사에는 국사찾기운동을 비난하는 노골적인 욕설이 담긴 편지가 날아들고 하루에도 수십 통의 격렬한 항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런데 이로부터 10년이 채 지나기 전에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 역사학자들이 공개 토론장에서 욕설을 듣기에 이르렀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다. 세 사람이 우기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유사역사학이 수년간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이라고 공격한 결과 삼인성호의 꼴이 나고 만 것이다."

    요즘도 그렇습니다만, 1980년대 서점가에 사이비 역사학자들이 쓴 책이 가득했다고 하니까 대중이 그런 '악서'를 읽으면서 시나브로 분위기가 바뀐 것이지요.
  • 남중생 2019/01/12 13:37 #

    답변도 책 소개도 감사합니다!
  • 동두철액 2019/01/12 16:30 # 답글

    81년, 87년의 경험으로 현 역사학계의 많은 학자들이 사이비 역사학에 대해 무시로 일관하는 계기가 되죠. 지금도 사이비 역사학에 관심을 주면 그들이 더 커질 것이라고 우려 하는 학계 선생님들도 계시고요.
  • 解明 2019/01/13 16:34 #

    1987년 이후에 사이비 역사학자들을 내버려 둔 결과가 어떤지를 본다면, 관심을 주지 말자는 의견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사이비 역사학자들과 토론하지 않더라도(어차피 말을 안 들으므로) 대중에게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알기 쉽게 소개하면서 사이비 역사학자들의 거짓말이 퍼지지 않도록 애써야겠지요. 역사학계가 관심을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이비 역사학자들은 강연회, 출판, 방송 등으로 영향력을 꾸준히 행사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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