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明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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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역사학의 등장과 활동⑴ 역사

문교부 장관을 지낸 사이비 역사학자 안호상(위키백과)

사이비역사학의 본격적인 등장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19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1972년 5월 11일 박정희 정부는 '교육의 국적을 찾자'는 대통령의 제창에 따라 문교부 산하에 국사교육강화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 교육을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대학예비고사에서 국사를 독립 과목으로 출제하는 한편, 대학에서도 국사 교육을 의무화하겠다는 구체적인 정책이 발표되었다.

같은 해 10월 유신헌법의 제정을 통해 1인독재 체제를 구축한 박정희는 다음 해인 1973년 6월 23일 또 다른 정책을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줄곧 검인정 체제하에 있었던 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명분은 학생들의 '주체의식과 올바른 국가관 확립'을 도모하고 다수의 교과서로 인해 발생하는 입시의 혼란을 고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목적은 새로 출범한 유신 체제의 선전과 정당화였다.

국사 교과서 국정화 조치에 대한 역사학계와 교육계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역사 교육의 획일화를 가져온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정부는 학계의 반대 여론을 무시한 채 1974년부터 국정 국사 교과서를 교육 현장에 배포하였다. 그런데 이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1974년 7월 25일 재야 역사 단체였던 한국 고대사학회(회장 안호상)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국정 국사 교과서가 단군을 신화로 규정하여 한국사의 범위를 위축시키고, 일제의 식민지 사관을 그대로 도습한 역사교육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인 26일에는 재건국민운동 중앙본부에서 '국사 교과서 평가대회'를 개최하며 공개적인 비판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안호상은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냈으며, 이승만 정권하의 통치 이론인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제시한 인물이다. 나치의 유겐트를 모델로 삼았다고 비판 받았던 '학도호국단'을 발족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역사를 전공하지는 않았다. 다만 단군과 고조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이른 나이에 대종교에 입교하여 평생 단군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 일이지만 그는 말년인 1992년에 대종교의 최고직인 총전교 자리에 오르기까지 한다.

당시 국정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 부분에서 "단군은 제사장이라는 뜻이며, 왕검은 정치적 군장을 뜻하는 것이므로, 단군 왕검은 곧 제정일치 시대의 족장"이었다고 서술하였다. 안호상 등은 이러한 국사 교과서의 내용에 강한 불만을 표하였다. 그들에게 단군은 경배해야 마땅한 한국인의 시조이자 위대한 사상의 시원이었다. 따라서 국사 교과서에서 단군이 미발달 사회의 일개 족장 정도로 묘사된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안호상 등은 1975년 10월 8일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여 기존 역사학계에 대한 전방위적 공세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대변지인 『자유』에 역사학계를 비난하는 글들을 연이어 실었는데, 그중에는 욕설에 가까운 인신공격도 매우 많았다. 특히 1978년 9월 29일에는 국가를 상대로 국정 국사 교과서의 내용 정정을 청구하는 행정소송을 벌여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역사학계도 가만히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1978년 11월 23일 역사학 관련 10개 학회 대표들이 모여 국사찾기협의회에 비과학적인 주장으로 국민을 오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중지할 것을 촉구하는 경고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국사찾기협의회에 가입된 재야 인사들이 ① 한자를 한국인이 만들고, ② 공자, 맹자도 배달겨레의 후손이며, ③ 백제가 4백년간 중국 중남부를 통치했고, ④ 공주 무령왕릉에는 백제사를 왜곡하기 위해 위조품을 미리 묻었다는 등 상식 이하의 기발한 주장을 선전하고 다닌다며, 이런 현상은 한국 문화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개탄했다.

무령왕릉을 발굴했던 김원용 교수는 "재야 인사들의 잦은 시비가 너무나 허무맹랑한 낭설이라 그동안 학계는 관여치 않았으나 문예진흥기금으로 발간되는 『자유』지가 전국 곳곳에 나가 국민을 오도함이 지대하므로 학계가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나서게 된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이 시기 안호상 등은 쇼비니즘에 입각한 비상식적인 주장들을 다수 제기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이 '무령왕릉 조작설'이다. 무령왕릉은 1971년에 발견된 백제 고분이다. 도굴이 전혀 되지 않은 채 백제 때 모습 그대로 발굴이 이루어져 화려한 금제 관식과 금 귀걸이 등 수많은 유물이 수습된 바 있다. 무령왕릉에서는 특히 무덤의 주인 이름이 새겨져 있는 묘지석이 출토되어 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에까지 영토가 뻗어 있는 '대제국' 백제를 상정하고 있던 이들에게는 무령왕릉의 규모나 출토 유물의 수준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에 광복 이후 남한 고고학계의 가장 중요한 발굴이라고 평가를 받았던 무령왕릉마저 조작된 것으로 치부하고 외면하는 등, 비상식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역사학계는 사이비역사학자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반박하는 한편 『경향신문』 지면을 통하여 <이것이 한국 고대사다>라는 기획 시리즈를 연재하는 등, 일반 대중에게 학계의 입장과 연구성과를 소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정도 대응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기경량의 「사이비역사학과 역사파시즘」에서

젊은역사학자모임의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에 첫 번째로 실린 글입니다. '슈도 히스토리(pseudo history)'의 번역어인 '사이비 역사학'의 정의를 비롯하여 사이비 역사학의 이모저모를 정리하였습니다. 이 글에서 발췌한 부분은 좀 길어서 두 편으로 나눠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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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남중생 2019/01/06 02:39 # 답글

    오, 감사합니다. “공자 한국인설”이 저 당시에 나온거였군요.
  • 解明 2019/01/06 14:41 #

    네, 사이비 역사학의 웬만한 떡밥은 일찍이 만들어졌고, 지금은 그것을 재활용하는 수준이지요.
  • 동두철액 2019/01/06 10:36 # 답글

    81년과 87년에 열린 공식토론회 장에서 사이비 역사학 측은 말도 안되는 주장과 인신공격 등의 한심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부끄러움을 모르는지 지금까지도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는 걸 보면 한숨만 나옵니다.
  • 解明 2019/01/06 15:19 #

    https://www.youtube.com/watch?v=NrALsUDAtUM

    2015년에 열린 어느 토론회에서 이덕일 씨가 1차 사료를 봐야 한다고 여러 사료를 인용했다가 윤용구 박사에게 논파된 일이 있었습니다. 위에 링크한 영상 시간으로는 1시간 25분 30초 무렵에 관련 내용이 나오는데, 이덕일 씨가 1차 사료 운운하던 것이 후대인이 붙인 주석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망신하고도 이 토론회에서 자기가 이겼다는 식으로 나중에 이야기했다고 하더군요. 사이비 역사학자들과 토론하는 일이 무의미함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 해색주 2019/01/06 16:47 #

    무의미 하다고 해서 그냥 두면 잡초처럼 번져나가서 사학계 전체를 갉아 먹으려고 들 판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내부적으로도 서로 의견이 너무 많이 갈려서 서로도 말이 안맞는 편이에요.
  • 解明 2019/01/06 17:42 #

    제가 무의미하다고 한 것은 공개 토론 등을 마련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사이비 역사학자들의 행태를 무시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사이비 역사학자들과 토론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강단 주류 역사학자'와 동등한 존재인 양 대중에게 선동하고 다닙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토론에서 이겼다고 거짓말도 합니다. 제가 링크한 토론회 동영상에 달린 댓글만 보더라도 이덕일 씨와 복기대 교수가 논리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토론 내용을 떠올리면 저 사람들이 토론회를 제대로 봤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이덕일 씨는 이러한 부분을 노리고, 걸핏하면 역사학자들에게 토론하자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문영 선생이 『만들어진 한국사』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어서 참고할 만합니다.

    "이미 1981년에 국회에서 공청회를 통해 유사역사가들과 역사학자들 사이에 공반전이 펼쳐졌습니다. 이 공청회에서 유사역사가들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역사학자들에게 난타를 당합니다만, 그 뒤에 이어진 선전 활동으로 마치 자신들이 역사학자들과의 논전에서 승리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공청회에서 한 가지 실수를 하는데, 그것은 상대 측을 역사학자라고 생각하고 대응한 것입니다. 이들은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학계의 사람들 대하듯이 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은 선전선동의 달인들이며 유사역사학으로 뼈가 굵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역사학자들과 논전한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존다리안 2019/01/06 17:42 # 답글

    혹시 일제시대 만세일계론이라든가 이후 일본 유사사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일본인=유태인설 같은
    것들과 뭔가 관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 解明 2019/01/06 17:50 #

    일본의 식민주의 역사학이 국내 사이비 역사학에 미친 영향은 이문영 선생의 『유사역사학 비판 - 『환단고기』와 일그러진 고대사』에 자세히 서술되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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