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明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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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 밖에서 한국사를 이야기하다 독서

한의 군현이 설치된 후 억압과 수탈을 당하던 토착민은 이를 피하여 이주하거나 단결하여 한의 군현에 대항하였다. 이에 한의 군현은 엄한 율령을 시행하여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하였다. 그에 따라 법 조항도 60여조로 증가하였고, 풍속도 각박해져 갔다.

제7 차 교육 과정에 따라 지난 2002년에 나온 마지막 국정 국사 교과서인 『고등학교 국사』는 한(漢) 제국이 고조선을 무너뜨리고서 그 땅에 둔 군현을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이 앞에는 한 군현이 토착민의 반발에 부딪혀 세력이 약화하고,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하였다는 내용도 쓰였지요. 우리 조상들이 '중국 침략자'에 맞서 싸웠음을 강조하였지만, 한 군현의 성격을 이해하기에는 글이 너무 짧습니다. 서기전 108년부터 서기 313년까지 400년 넘게 존속한 낙랑군(樂浪郡)은 교과서에서 스치듯 지나갈 뿐이며, 3세기 전후에 설치된 대방군(帶方郡)은 아예 이름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국사』에서 더 기가 막힌 부분은 '여러 나라의 성장'이라고 설명한 지도입니다. 부여, 고구려, 옥저와 동예, 삼한 등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자리 잡은 나라들을 나타낸 이 지도에서 낙랑군과 대방군은 아무리 찾아봐도 온데간데없습니다. 이 무렵 대동강 유역은 중국의 선진 문물이 바다를 건너서 곧바로 들어오던 곳이었음에도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던 곳인 양 지도에 그려졌습니다. 제3 차 교육 과정을 따르던 때까지만 하더라도 낙랑군과 대방군을 지도에 버젓이 표시한 사실에 견주면, 이해하기 힘든 대목입니다(관련 자료). 어쩌면 국정 국사 교과서 집필진은 한 군현을 근대 식민지와 비슷하다고 여겼기에 그 존재를 가능한 한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아닐까요? 지도에서 사라진 낙랑군과 대방군은 교과서 밖으로 밀려난 역사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국정 국사 교과서의 고대 한반도 지도에서 지워진 낙랑군과 대방군(우리역사넷)

그러나 낙랑군과 대방군이 우리 고대사에 미친 영향력은 작지 않습니다. 가락국(금관가야)의 전신인 구야국은 한 군현과 왜(倭)를 잇는 중개 무역으로 성장하였으며, 삼한의 군장들이 한 군현에서 준 인수(印綬)를 차고 의책(衣幘)을 입기를 즐겼다고 할 만큼 낙랑 문화는 한반도 남부까지 널리 퍼졌습니다. 백제 책계왕(責稽王, 재위 286~298)이 대방군 태수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인 사건도 기억할 만합니다. 물론 책계왕이 (아마 낙랑군을 가리키는 듯싶은) 한 군현의 침입으로 전사하고, 그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오른 분서왕(汾西王, 재위 298~304)이 낙랑군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면서 갈등이 커졌으나, 교과서에 서술된 대로 한 군현을 '중국 침략자'로만 기억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음이 여러 사료로 드러납니다.

313년과 314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낙랑군과 대방군은 한반도에서 사라졌지만, 그곳에 살던 이들은 남아서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들은 자주자주 바뀌던 동진(東晉)과 후조(後趙)의 연호를 벽돌무덤에 그때그때 적었는데, 이것은 한 군현이 고구려에 의해 쫓겨났어도 낙랑군과 대방군 사람들이 중국에 꾸준히 다녀왔음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또한, 낙랑군과 대방군 사람들이 4세기 중반부터 중국 계통의 벽돌무덤을 대신하여 고구려 계통의 돌방무덤을 만들면서 고구려에 적응해 나가던 모습도 엿보입니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재위 412~491)이 427년에 낙랑군의 치소인 조선현에서 가까운 평양으로 천도한 까닭은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은 성싶습니다. 낙랑군과 대방군 사람들의 후손이 '고구려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면서 한 군현에서 이루어지던 한자 문화와 행정 제도 등을 수월히 받아들이기에 좋은 환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백제에서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백제의 대외 관계사와 해양사를 연구한 임동민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낙랑군·대방군 사람들의 도움은 백제에서도 확인된다. 백제로 이주한 낙랑군·대방군 사람들은 백제에 중국의 문물과 기술을 전파하고 외교문서의 작성과 통역 역할을 하였다. 중국에 파견된 백제 사신 중에는 낙랑군·대방군 사람의 후예로 보이는 인물도 있었다. 《송서宋書》와 《남제서南齊書》에는 장위張威, 회매會邁 등 백제 사신의 이름이 남아 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대방군 지역 벽돌무덤에서 확인되는 장張, 회會 등의 성씨를 지닌 대방계 인물로 파악된다.
- 「한국 고대사에서 사라진 낙랑군·대방군 사람들」에서

이처럼 우리가 한 군현을 역사 서술에서 지운다고 해서 낙랑군과 대방군 사람들이 우리 역사에 남긴 발자취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데 이바지한 그들을 근대 민족주의라는 잣대로 '중국인'으로만 여기는 게 타당한 일일까요? 오히려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직시해야 당시 시대상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창립총회에 모인 회원들의 모습(한겨레)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이하 만인만색)에서 펴낸 『한뼘 한국사 - 한국사 밖의 한국사』(관련 정보)는 부제에 걸맞게 낙랑군과 대방군 사람들처럼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이들에게 시선을 돌린 역사책입니다. 「월남에서 온 그는 왜 '김 병장'이 아니었을까 - 베트남 특수의 군 계급별 경험 차이」를 쓴 역사문제연구소의 권혁은 연구원은 베트남 특수에서 소외된 사병들의 처지를 조명하였고, 「식민지기의 '옥바라지'와 현재의 우리」를 쓴 같은 연구소의 전영욱 연구원은 서대문 형무소 맞은편에 있었던 옥바라지 골목을 소재로 삼아서 일상에서 권력에 저항한다는 뜻을 되짚습니다. 그리고 만인만색 사무장을 맡은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의 윤성준 연구원은 「미군 포로심문보고서가 남긴 한국전쟁기 한 포로의 삶」으로 일본군에서 국군으로, 다시 군국에서 인민군으로 군복을 갈아입다가 한국 전쟁에서 미군에 사로잡힌 노재길이라는 사내의 행적을 들여다봅니다. 젊은이들에게 생사를 가르는 선택을 끊임없이 강요하던 한국 근·현대사에서 노재길이 겪은 기구한 운명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했으나, 부끄럽고 자랑스럽지 않기에 공인된 기억에서 잊히고 말았음을 새삼 깨닫게 하는 글이지요. 모두 한국사 교과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던 역사학도들이 2016년에 모여 만든 만인만색답게 국가 독점의 역사 서술을 뛰어넘겠다는 의지를 『한뼘 한국사』에 담았다고 할 만합니다. "본디 역사가 버티고 선 저변은, 국사 혹은 역사교과서가 딛고 선 좁은 땅보다는 언제나 광활하기 마련"이라는 책 속의 지적대로 한국사 교과서가 그리지 못한 역사의 땅에 발을 내딛고자 한다면, 만인만색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요? 책을 읽고 나면,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한 뼘' 더 깊어졌음을 스스로 느낄 것입니다.

덧글

  • 남중생 2018/12/21 23:39 # 답글

    "삼한의 군장들이 한 군현에서 준 인수(印綬)를 차고 의책(衣幘)을 입기를 즐겼다고 할 만큼 낙랑 문화는 한반도 남부까지 널리 퍼졌습니다."라는 내용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한 군현과 인수(印綬)에 대한 이야기는 한나라가 정벌한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보인다고는 들었는데, 고조선 멸망 이후의 한반도 관련 기록에서도 자주 보이는 내용인지요?


    베트남 지역(한 군현)의 고대사를 이야기할 때도 자주 언급되는 구절이 있는데 동인과 청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현에는 대개 락장(雒將)이 있었다. 락장은 구리 도장(銅印)과 푸른 끈(青綬)을 가졌다."

    리암 켈리 교수님은 "이 구절이 사실 친한파(親漢派)의 행적"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나라의 군현제 아래 다스리고, 한나라의 통치 상징물을 사용하는 락 관료를 묘사함으로써, 이 구절은 '동 선 머리사냥꾼' 중 일부가 결국 한나라의 현지 관료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라고 해석합니다.
    (http://inuitshut.egloos.com/1931859)
  • 解明 2018/12/22 21:53 #

    http://db.history.go.kr/id/jo_004r_0010_0070_0070

    해당 내용은 『삼국지(三國志)』에 나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인수를 직접 언급하는 기록은 많지 않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만 의책이나 관책 등을 줬다는 내용은 눈에 띕니다.
  • 001 2018/12/23 19:46 # 삭제 답글

    겨우 11년전 것도 다 비공으로 돌리는 처지에 왠 2천년전 낙랑 타령이실까 ㅋㅋㅋㅋㅋ 좀 있으면 3년 전 포스팅도 다 비공으로 돌릴거면서 ㅋㅋㅋㅋㅋㅋ
  • 解明 2018/12/24 18:10 #

    오랜만에 댓글 썼네. 밥은 먹고 다니지? 예나 이제나 헛소리하고 다니는 것을 보니 별일 없이 사나 보네.
  • 단군족 2019/01/02 17:41 # 삭제 답글

    삼국지에서 삼한은 사방 4천리라고 하였는데, 한국의 남한 구석에 배치하는게 아니라고 봅니다.
    좌우로 바다니까 맞기는 한데, 4천리이면 압록강 넘어까지 즉 길림성까지 영역이 되어야 4천리가
    되는게 맞겠지요.
  • 解明 2019/01/02 18:25 #

    그러면 삼한 남쪽에 있었다는 왜는 어디에 둬야 하나요? 무슨 밀어내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사방 4천 리는 길이가 아니라 넓이입니다만?
  • 단군족 2019/01/02 17:42 # 삭제 답글

    그런 내용이 만주원류고에도 나오기때문에 삼국지와 원류고 내용을 보았을 때 신빙성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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