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明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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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는 일본어, 집에서는 조선어를 쓰던 시대의 풍경화 영상


지난 2014년에 중국에서 필름을 찾은 <수업료(授業料)>(관련 정보)는 1939년에 촬영하여서 1940년에 개봉한 영화입니다. 학비를 제때 내지 못할 만큼 집안이 가난한 소년 우영달(정찬조 분)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식민지 조선인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잘 나타냈습니다. 영화사 사장이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연설을 갑자기 하는 <반도의 봄(半島の春)>이나 고아들이 황국 신민 서사를 난데없이 외우는 <집 없는 천사(家なき天使)>처럼 서사 전개에서 벗어나서 친일 성향을 드러내지 않습니다만, 일제의 황국 신민화 정책이 일상에 깊이 스며든 듯하여서 더 씁쓸한 기분이 듭니다.

학교에서는 잡담을 나눌 때조차 일본어만 쓰던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조선어로 말하는 모습은 식민지 시기가 이중 언어 사회였음을 새삼 일깨웁니다. 물론 일제 강점기에 촬영한 영화 대부분은 일본어 대사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만, <수업료>는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서로 달랐음을 묘사했기에 눈길을 모읍니다. 당시 '고쿠고[国語, 국어]'라고 불리던 일본어에 억눌린 조선어가 처한 현실을 이보다 더 잘 보여 주는 자료가 있을까요?

칠판에 그려진 지도와 일본어로 '우리나라'라고 적힌 글씨(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주인공 영달이가 식민지 시기에 살았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일본어만이 아닙니다. 일본인 배우 스스키다 겐지[薄田硏二, 1898~1972]가 연기한 다시로 선생은 칠판에 한반도와 일본 열도 지도를 나란히 그리고서 학생들에게 경성(서울)과 수원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봅니다. 이때 지도 옆에 적힌 글은 '우리나라[我が国]'입니다. 한반도에 있는 도시들을 가르치면서 굳이 일본 열도까지 그린 까닭이 엿보이는 대목이지요. 다시로 선생이 이야기하는 '우리나라'가 조선이 아니라는 사실은 영달이가 집에서 책을 낭독하는 장면에서 다시 드러납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의 중심 일본 열도, 조선 반도(한반도)를 지나 만주국에서 관동까지 아우르는……."

또한, 몽골군의 침략을 막는 가마쿠라[鎌倉] 막부 소속 무사들의 전투를 장엄하게 서술한 교과서 내용이 고스란히 나온다든가 아주머니 댁에 가서 학비를 받고자 수원에서 평택까지 홀로 걸어가던 영달이가 어느 숲에서 군가인 <애마진군가(愛馬進軍歌)>를 부른다든가 하는 장면도 시대상이 느껴집니다. 어린이들마저 군국주의에 물들게 한 광기는 어디에서 비롯하였는지 고민하게 합니다.

사실 영화 속에서 다시로 선생은 훌륭한 교육자라고 할 만합니다. 자기가 맡은 반 아이들이 조선인이라고 하여서 차별하지 않고, 학비를 못 냈다고 꾸짖지 않으며, 몸져누운 영달이 할머니(복혜숙 분)를 병문안하는 다시로 선생의 행동은 감동을 자아낼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다시로 선생 같은 인격자조차 학교를 군대화하는 교육이 잘못되었음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제는 패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아픈 역사를 담았으나, 오늘날 우리에게 <수업료>는 귀중한 시청각 자료입니다. 무엇보다 영화 배경으로 지나가는 수원 화성의 옛 풍경은 정겹게 다가옵니다. 성벽의 여장은 스러지고, 포루의 벽돌은 무너졌지만, 수원 화성 안팎 경치는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안타깝습니다.

덧글

  • 진냥 2018/11/09 00:14 # 답글

    영화 관람은 좋아하지 않는데 굉장히 흥미롭네요!!!
    [학교사로 보는 일본 근현대사]라는 책을 곧 포스팅할 작정인데 일본 제국 시대의 여러 교사상을 다시로 선생과 비교하게 되어 더욱 볼 마음이 높아집니다...!!!
  • 解明 2018/11/09 22:23 #

    친일 성향을 빼고 본다면, 각본에 신경 쓴 작품이라서 그런지 만듦새는 꽤 괜찮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요. 관람한 뒤에는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해지는 영화입니다.
  • 남중생 2018/11/12 02:11 # 답글

    흥미로운 영화를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을 내서 본 다음에 더 이야기하겠지만, 일제시대 국어교과서를 봤다가 동해/일본해를 두고 마치 "우리나라"에 끼어있는 작은 욕조나 연못 같다고 표현하는 글이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바다를 에워싼 "우리나라"였던거죠.
  • 解明 2018/11/12 21:14 #

    아직 『조선어독본』 같은 식민지 시기 교과서를 제대로 본 일이 없는데,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읽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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