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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수원 화성의 중심 도로는 남북으로 났을까? 독서

며칠 전에 수원 화성을 견학할 일이 있어서 배경지식을 쌓고자 김동욱 교수의 『실학 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 화성』(관련 정보)을 읽었습니다. 이 책 머리글에서 김 교수는 수원 화성의 도시적인 측면을 부각하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는데, 그 말대로 화성이 다른 읍성들과 무엇이 다른지 자세히 서술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남향한 관청 앞으로 중심 도로가 동서로 지나가는 여느 읍성과 달리 화성은 관청(화성 행궁)이 동향하였기에 중심 도로가 남북으로 났습니다. 1789년에 지금의 화성시에서 수원시로 수원읍을 옮겼을 때 팔달산 남쪽에 관청을 세울 법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세로지는 길이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왜 수원 신읍을 설계한 이들은 전례를 어겼을까요? 김 교수는 새로운 도시관이 도시의 좌향을 돌렸다고 설명합니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상업이 발전하고, 도시 인구가 성장하면서 조선 사회는 변화를 맞습니다. 도시도 거기에 맞춰 행정 중심지에서 경제 중심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한양 도성과 삼남을 잇는 교통로에 자리 잡은 수원에 건설할 신도시는 새로운 도시관을 담는 그릇이 되어야 했습니다. 한양에서 삼남으로 이어지는 길이 수원에 와서 직각으로 크게 꺾이지 않고 곧게 뻗으려면, 신도시의 중심 도로를 동서 방향이 아니라 남북 방향으로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통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의도를 도시 구조에 반영한 셈이지요. 화성 남문을 팔달문이라고 이름 붙인 데에서도 수원을 '사통팔달(四通八達)'하는 곳으로 꾸리겠다는 위정자들의 뜻이 엿보입니다. 화성에서 특별한 것은 중심 도로만이 아니었습니다.

수원 신읍을 둘러싼 화성 성곽에는 옹성, 적대, 치, 각루, 포루, 장대, 공심돈, 노대 등 방어물이 곳곳에 놓였습니다. 한눈에 봐도 기존 성들과 생김새가 아주 다릅니다. 이러한 독특한 풍경은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머릿속에서 비롯하였습니다. 화성 건설을 앞두고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내린 어명을 받들어 축성 방안을 제시한 정약용은 전에 없던 성을 쌓고자 했습니다. 조선과 중국의 성곽 제도를 두루 연구한 정약용은 공심돈 같은 시설을 새로 도입하자고 제안하였는데, 그가 쓴 계획안은 몇 가지 수정을 거쳐서 실천에 옮겨졌습니다. 천재로 이름난 사람답다고 해야 할까요. 다만 하늘 아래 새것이 있을 리 없다는 말처럼 정약용의 구상은 읍성 강화론이라는 흐름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수원 화성의 서문인 화서문 일대의 풍경(수원문화재단)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잇달아 겪으며, 방어물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읍성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읍성 강화론이 일찍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정약용에게 까마득한 선배라고 할 만한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펼친 읍성 강화론은 그것과 좀 달랐습니다. 유형원 이전에 읍성 강화론을 외친 이들의 생각은 산성을 중시한 방어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유형원은 산성의 방어력도 못 미더워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산성은 지키거나 싸우기에 알맞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읍성을 튼튼하게 쌓아서 백성을 지키는 근거지로 삼는 게 낫다고 여겼습니다.

기실 유형원이 생각한 대로 날이 갈수록 도시로 사람들이 모이고, 재물이 쌓이는 상황에서 옛날처럼 읍성을 버리고, 산성으로 들어가는 전략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읍성 강화론이 정책으로 채택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화성은 산성보다 읍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유형원의 바람이 이루어진 곳이었습니다. 유형원이 수원 고을을 옮기자는 의견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돌이키면 묘한 인연입니다.

화성은 18세기에 와서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 인구가 증가하는 시점에서 새로 장소를 옮겨 건설된 신도시다. 이 신도시는 종래와 같은 단순한 행정 기능을 담당하는 도시나 군사 도시와는 성격이 달랐다. 따라서 여기서는 과거처럼 읍성 주변에 산성을 설치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의 성곽관이 필요하였다. 그것은 바로 산성에 의존하던 종래의 성곽관을 버리고 평상시 거주하는 읍성을 강화하고자 한 17세기 실학자들의 성곽관이었다. 반계 유형원이나 성호 이익(星湖 李瀷)과 같은 실학자들은 읍성을 어떻게 강화해야 할지 여러 방안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런 주장이 정약용에 의해 구체적으로 설계되었다. 정약용은 화성에는 따로 산성이 없었으므로 새로운 방어 시설을 가득 설치하여 읍성 자체의 방어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정조가 온갖 정성을 들인 덕분에 화성은 빠르게 성장하였습니다. 시전과 장시 규모는 한양에 버금갈 만큼 확대되었으며, 호구는 약 1,000호가 넘었습니다. 하지만 화성이 그때까지 보기 드문 계획도시였다고 하더라도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동욱 교수는 화성이 근대의 계획도시처럼 지역 계획을 수립하거나 인구 밀도를 고려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왕릉(사도 세자의 무덤인 현륭원)과 행궁을 지키려고 성을 쌓았다는 정조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화성은 왕실의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성역(城役)을 마친 지 4년 만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수원을 향한 조정의 관심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수부(留守府)라는 위상은 지켰으나, 도시 성장은 멈췄습니다. 조선 왕조가 몰락하면서 수원도 쇠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원시는 1967년에 경기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면서 재도약할 계기를 마련합니다. 또한, 섬유 업종과 전자 업종이 등장하면서 지역 경제가 살아났습니다. 그 결과 수원시는 현재 광역시 못지않은 인구수를 자랑하는 대도시로 커졌지요. 그리고 한국 전쟁으로 훼손된 수원 화성은 1970년대에 대규모 복원 공사를 거치면서 수원시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화성을 경제 도시로 키우려고 한 정조의 꿈은 20세기에 이르러 열매를 맺었습니다.

『실학 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 화성』은 수원 화성을 이해하는 길라잡이로 삼을 만한 책입니다. 그러나 2002년에 나왔기에 최신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이를테면 지난 2012년에 복원된 남수문(관련 기사)을 책에서는 복원되지 않았다고 쓰였습니다. 또한, 화성 성역과 정조의 정치 개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명쾌하게 서술하지 못한 부분도 아쉽습니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고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여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는 김 교수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왕권 강화가 정치 개혁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과연 정조는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개혁 군주에 어울리는 인물이었을까요?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과제입니다.

덧글

  • 남중생 2018/11/08 18:25 # 답글

    오오, 새로운 도시관!
    좋은 통찰을 얻어갑니다.
  • 解明 2018/11/08 21:21 #

    저도 책을 읽으면서 새삼 깨달은 부분입니다.
  • 남중생 2018/11/08 21:24 #

    그런데, 그렇다면 수원화성의 방어력? 수성력?은 기존의 성에 비해 크게 높다고 할 수 있나요?
    신기술을 이용해서 좀더 튼튼하게 지은 것 정도밖에 모르는데...군사학적으로 볼 때 실제 방어력도 좋다고 할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 解明 2018/11/08 21:41 #

    낙안 읍성처럼 현재까지 원형이 잘 남은 읍성을 보면, 성벽을 빼면 이렇다 할 방어물이 없으므로(성벽도 그리 높지 않고요) 수원 화성이 기존 읍성보다 방어력은 뛰어났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수원 화성이 전근대에 전쟁을 겪지 않았기에 처음 계획한 만큼 방어력을 발휘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장안문의 오성지는 정약용이 보고서 설계한 대로 만들지 않은 탓에 효과가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지요. 또 옹성으로 들어온 적군을 공격해야 할 총안이 없다는 점도 문제이고요.
  • 남중생 2018/11/08 21:45 #

    아앗, 그 "독 안에 든 쥐" 전략을 못 쓰다니...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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