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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러시아의 발해 연구 역사

러시아에서 발굴한 발해 장군 섭리계의 청동 부절(연합뉴스)

중국과 러시아는 모두 발해사를 말갈의 역사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것을 토대로 서로 발해사를 자국의 역사에 끌어넣으려고 한다.

중국에서 발해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개혁·개방 정책이 실시된 이후로, 지금까지 발표된 수백 편의 관련 문헌 가운데 1980년 이후에 발표된 것이 90%에 이른다. 중국에서는 그들 역사의 범주를 현대의 중국 영토 안에 있었던 과거의 역사 모두로 잡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소수 민족 동화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문제는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중국 학자들은 부여·고구려·발해가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 존재했던 나라라는 이유만으로 중국사의 일부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연구가 아직 체계화된 것은 아니다. 고구려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다루고 있는데, 그 논리대로 한다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건 말갈을 계승했건 간에 중국사에 속하게 된다. 그런데도 발해사 연구자들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사실을 굳이 부정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순이 발견된다. 최근에 와서야 이를 깨닫고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더라도 중국사에 속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발해사에 대한 중국인들의 시각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학자들로는 왕청리[王承禮], 쑨위량[孫玉良], 쑨진지[孫進己]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근래에 이르러 조선족 학자들로부터 조용히 비판받고 있다. 정효공주 묘비문에는 그의 아버지 문왕을 '황상(皇上)'으로 표현한 대목이 있다. 이것은 황제와 동일한 의미로서, 발해가 황제국을 표방하고 있었음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따라서 발해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는 중국인 학자들의 견해는 타당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이 구절에 대해서 중국인 학자들은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중국인의 주장에 대해 1960년대 옛 소련 학자 오클라드니코프도 비판한 적이 있다. 그는 모든 문화의 발상지를 중원으로 보는 중국인들의 견해를 '중국중심주의', '아시아중심주의'라고 비판하고 이를 극복할 것을 역설했다. 그 후의 발해사 연구자도 이를 이어받아 발해사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중국 학자들은 연해주를 점령한 러시아인이 그 지역의 역사마저 자기 역사로 끌어들이려는 '팽창주의' 아니냐고 반박했다. 옛 소련의 발해사 연구는 이미 19세기 중반 제정러시아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본격화된 것은 1950년대말부터였다. 전문적으로 발해사 연구에 전념한 사람으로는 오클라드니코프의 제자로서 한국에도 두 번 다녀갔던 샤프쿠노프 박사이다. 이들로 인해서 연해주 지방에 남아 있는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조사되어 발해의 변방사 연구에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연해주 지방에 대해서는 문헌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들은 전적으로 고고학적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성은 오히려 새로운 방법론의 개발을 부추겨 유적에서 출토된 곡물이나 동물 뼈를 분석하여 당시의 경제 상황을 파악하려 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성터에서 소·말·돼지·개의 뼈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중에서 소 뼈를 분석해보니 흥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발해 전기 유적에서는 어린 소의 뼈가 많은 데 비해, 후기 유적에서는 늙은 소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후기로 갈수록 소를 경작에 이용하다가 도살했음을 말해 준다.

러시아 학자들이 발해사를 독립된 역사로 보려는 데는 발해사는 중국사로부터 떼어내어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것은 이들의 연구 시각이 발해 전체보다는 연해주 지방에 국한되어 있고, 기본적으로 발해사 자체를 규정하기보다는 러시아 내에 있는 연해주 지방의 과거 역시 규명에 초점을 맞추려 하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발해 문화를 설명하면서 중국 문화 요소보다는 오히려 중앙아시아나 남부 시베리아 문화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발해사를 러시아 극동의 소수 민족인 말갈족의 역사, 나아가서는 러시아 역사의 한 부분으로 파악한다. 그러면서도 고구려 문화와 발해 문화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중국측보다 훨씬 더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남북한도 가세하여 발해는 땅만 여러 나라로 갈라져 계승된 것이 아니라 역사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의 『한국생활사박물관 06 - 발해·가야생활관』에서

최신 연구 경향은 아니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중국과 발해에서 발해사 연구가 그동안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간략하게 이해할 만한 글입니다. 2009년에 중국에서 발해 간왕(簡王, 재위 817~818)의 부인인 순목황후(順穆皇后) 태씨(泰氏)의 무덤이 발굴되어서(관련 기사) 발해사 연구가 좀 더 진전되었어야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인들은 무덤을 발굴한 지 10년이 다 되어감에도 묘지명 전문을 여태껏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발해사가 온전히 한국사의 영역에 들어온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진리를 좇기보다 정치에 억눌린 중국 학계의 실태를 보는 듯해서 마음이 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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