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明의 수사학

explain.egloos.com

포토로그



반도의 '봄'인가? '겨울'인가? 영상


1941년에 개봉한 이병일(李炳逸, 1910 ~ 1978) 감독의 영화 <반도의 봄(半島の春)>(관련 정보)은 일본어와 조선어를 갈마들며 쓰던 식민지 조선인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 줍니다. 배우 지망생 김정희(김소영 분)와 음반사 문예부장 한계수(김한 분)의 첫 만남을 그린 장면에서 그것이 잘 드러납니다.

失礼ですがお年は?(실례지만 나이는?)

열아홉이에요.

趣味は?(취미는?)

음악과 영화를 퍽 좋아해요.

なかなか 先端的ですね!(아주 첨단적이로군요!)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조선어로 말할 때마다 화면 오른쪽에 뜨는 일본어 자막도 시대상을 엿보게 합니다. 일본어 자막은 당시 일본어가 조선어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잊지 말라는 표시처럼 보입니다. 일본어가 몸에 자연스레 밴 조선인들을 보면, 씁쓸한 마음이 들지요.

영화를 보면, 이병일 감독이 이중 언어 사회가 초래한 상황을 인물의 성격에 반영하려고 했다는 느낌이 옵니다. 도쿄에서 무용을 배웠다는 안나(백란 분)는 옷차림이 세련된 '신여성'답게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합니다. 극중극 <춘향전>을 촬영하는 장면에서 조선어 몇 마디를 쓴 일을 빼면, 안나의 대사는 일본어밖에 없습니다. 그와 달리 한복을 입은 데다가 거의 조선어로 말하는 김정희는 '구여성'의 전형인 듯싶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한계수가 일본어로 질문을 던져도 김정희는 조선어로 대답합니다. 주인공 이영일(김일해 분)을 사이에 두고 연적이 되는 두 사람의 겉모습은 대조를 이룹니다.

영화인들의 삼각관계를 다룬 영화 <반도의 봄>의 한 장면(다음 영화)

그래서 공금을 횡령한 죄로 위기에 빠진 이영일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 주는 안나의 행동은 뜻밖으로 다가옵니다. 영화 촬영이 어려움에 부딪히자 생계를 위하여 연예계를 떠나면서 냉정할 만치 동료들에게 등을 돌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신여성'은 외형일 따름입니다. 또 김정희는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마다 수줍어하는 낯빛을 드러내면서도 배우와 가수를 병행하며 대중 앞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구여성'의 탈을 쓴 멀티 엔터테이너라니! 지금 봐도 흥미로운 인물 설정입니다.

하지만 <반도의 봄>은 식민지 시기에 나온 영화 대부분이 그러하듯 '친일 영화'라는 비판이 따라다닙니다. 영화인들이 힘을 모아 세운 반도영화주식회사의 사장이 일장 연설을 하며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대목은 난데없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장의 말을 듣는 허훈(서월영 분)의 얼굴은 비장하다기보다 어두워 보입니다. <춘향전>을 감독하는 허훈으로서는 그동안 발목을 잡던 제작비 문제가 해결되어 한숨 돌렸음에도 어딘지 씁쓸함마저 묻어납니다.

영화는 일본으로 견학하러 가는 이영일과 김정희를 배웅하러 경성역에 나온 허훈을 비추며 끝나는데, 이 장면에서도 그가 짓는 표정은 어두컴컴합니다. '봄'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화명(畫名)이 무색하게 허훈의 마음은 '겨울'인 듯합니다. 이병일 감독이 허훈을 통하여 일본 영화에 종속된 조선 영화의 암담한 현실을 암시하려고 한 게 아니었냐고 해석한다면 지나친 일일까요? 민족의 고전이 된 고소설을 영화화하겠다는 꿈을 이루려면 일제의 식민 정책에 '협력'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처지에 놓인 허훈의 속내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그는 이영일과 김정희를 태운 기차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핑백

  • 解明의 수사학 : 학교에서는 일본어, 집에서는 조선어를 쓰던 시대의 풍경화 2018-11-08 23:00:26 #

    ... 정찬조 분)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식민지 조선인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잘 나타냈습니다. 영화사 사장이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연설을 갑자기 하는 &lt;반도의 봄(半島の春)&gt;이나 고아들이 황국 신민 서사를 난데없이 외우는 &lt;집 없는 천사(家なき天使)&gt;처럼 서사 전개에서 벗어나서 친일 성향을 드러내지 않습니다만 ... more

덧글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