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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장화와 홍련을 죽였는가? 독서

『장화홍련전』(관련 정보)은 우리나라에서 웬만한 사람이라면, 줄거리를 거의 다 알 만큼 유명한 고소설입니다. 이 작품을 읽었다면, 주인공인 장화와 홍련 자매가 계모 허씨가 꾸민 모략에 빠져 죽임을 당했다는 걸 모를 리 없습니다. 두 처녀 귀신이 부사(府使) 앞에 나타나 원한이 서린 사연을 호소하는 소설 후반부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아 독자의 흥미를 자아냅니다. 그렇지만 작가가 판 함정에 걸리지 않으려면, 소설을 읽으면서 장화와 홍련을 죽인 이는 누구인지 꼼꼼히 되짚어야 합니다.

작중에서 허씨와 허씨의 아들 장쇠는 장화를 죽인 것이 들통나서 극형을 받습니다. 장화에게 가족 몰래 아이를 뱄다가 낙태했다는 누명을 씌운 허씨는 능지처참을, 배다른 누나를 못에 빠뜨린 장쇠는 교수형을 당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누가 장화와 홍련을 죽였는지 굳이 물을 까닭이 없습니다. 하지만 허씨와 장쇠 말고도 제삼의 범인이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장화와 홍련의 친부이자 허씨의 남편인 배무용, 일명 배 좌수가 바로 두 자매를 죽인 또 다른 범인입니다.

허씨의 음모에 가담한 공범인 배 좌수는 어떻게 보면, 주범인 허씨나 허씨의 사주를 받은 장소보다 더 나쁜 인간입니다. 배 좌수는 후처로 들인 허씨가 사별한 아내 장씨가 낳은 장화·홍련 자매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습니다. 심지어 딸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허씨에게 직접 경고하기까지 하였지요. 그런데 배 좌수는 허씨의 거짓말에 어처구니없이 속아서 장화를 의심하고, 딸을 사지에 몰아넣습니다. 나중에 장화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알게 되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장화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의문을 품은 홍련 앞에서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지요. 그는 철저하게 무능한 아비일 뿐입니다.

서술자는 배 좌수를 가리켜 "원래 성품이 인자하나 판단력이 부족해 남의 말을 잘 들었다"라고 하면서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합니다만,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향청(鄕廳)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한밤중에 자기가 내린 명으로 억지로 집을 나서게 된 장화와 떠나는 언니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홍련을 보면서도 배 좌수는 "측은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며 매정한 면모를 드러냅니다. 딸의 목숨보다 가문의 체면을 중시하는 인간답습니다.

기가 막힌 점은 장화와 홍련이 철산 부사 정동호에게 자기들 아비는 "인자하고 순해서 악한 마음은 조금도 없는데, 간악한 계모의 꼬임에 빠져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배 좌수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못난 아비라고 하더라도 잔 잡은 팔이 안으로 굽는가 봅니다. 그들은 죽어서도 가부장제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게는 이 장면이 그들의 안타까운 죽음보다 더 큰 비극으로 보였습니다. 딸들의 원혼이 애쓴 덕분에 배 좌수는 정동호에게 훈계만 듣고 관아에서 풀려납니다. 살인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음에도 솜방망이 처벌로 죗값을 치른 배 좌수는 다시 새장가를 가서 쌍둥이 딸을 얻는데, 그 딸들이 장화와 홍련의 환생이라는 결말에 이르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옵니다. 이건 해피 엔딩이 아니라 '헬피 엔딩'이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1972년에 개봉한 영화 <장화홍련전>의 한 장면(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17세기 중반, 평안도 철산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소설화한 『장화홍련전』은 배 좌수에게 면벌부를 준 이야기나 다름없습니다(관련 글). 작가는 배 좌수를 무능할지언정 정감 넘치는 아버지인 양 그림으로써 그의 죄를 사하고자 하였습니다. 모든 잘못은 계모에게 뒤집어씌웠으니 마음에 거리끼지 않았겠지요. 그러면서 죽음을 부른 제도의 모순도 자연스럽게 가려졌습니다. 허씨가 극악무도한 여자라서 전처소생을 핍박하고 살해하였다고 하면 그만인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허씨의 이야기를 들으면, 사건의 본질이 그리 단순하지 않아 보입니다.

"저는 대대로 이름난 집안의 자손이었으나 집안이 점점 기울어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던 차에 배 좌수와 혼인해 후처로 들어갔나이다. 전실이 낳은 딸 자매가 매우 아름답기로 친자식같이 길렀나이다. 하지만 점점 자라 나이 스물이 되니 행실이 점점 엉큼해져 제 말은 백 마디의 한 마디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무례한 일을 많이 저질렀으며, 저를 원망하고 비방했사옵니다. 그래서 때때로 둘을 타일러서 아무쪼록 사람이 되게 하고자 노력했나이다.

하루는 저희들 둘이 비밀스럽게 말하는 것을 우연히 엿듣게 되었사온데, 그 말이 극히 흉측하고 도리에 어긋나 무척 놀랍고 분했사옵니다. 하지만 가장에게 말하면 제가 거짓말을 하는 줄 알고 듣지 않을까 하여 가장을 속이고 장화를 죽일 생각으로 쥐를 잡아 피를 묻혀 장화가 자는 이불 속에 넣고 낙태한 것처럼 꾸몄나이다."

물론 자기변호가 강한 허씨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란 어렵습니다. 다만 장화·홍련 자매가 곁을 주지 않아서 사이가 벌어졌다는 내용은 주목할 만합니다. 소설에서는 장화와 홍련이 장씨를 그리워하며 자주 우는 듯한 묘사가 나옵니다. 그들이 엄마 품에 안기고 싶은 어린아이라면 모르겠으나, 혼기가 다 되도록 다른 사람 앞에서 죽은 어머니가 그리워서 운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배 좌수는 딸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 허씨를 꾸짖는데, 그런 일을 겪은 허씨는 장화와 홍련의 눈물이 자기를 향한 무언의 시위라고 여기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죽은 장씨의 친정 재물로 넉넉하게 사니 딸들에게 잘하라는 배 좌수의 발언은 허씨의 자존심을 긁어 놓았습니다. 장쇠를 비롯하여 아들을 셋이나 낳았지만, 배씨 가문에서 허씨의 위치는 재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허씨는 심성이 고운 사람이 확실히 아닙니다. 용서받기 힘든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죄인인 것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배 씨 부녀가 허씨의 시기심을 자극하는 행동을 오랫동안 벌인 점은 고려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전실 소생과 후처가 대립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 다음에 그것을 선악 대결로 규정하였다면, 파국은 언제가 됐든 결국 닥치고 말았을 테니까 말이지요. 한 가정이 무너진 책임을 부부가 함께 짊어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은 법망을 빠져나가고, 나머지 한 사람은 희생양이 되어 악인이자 괴물로 형상화되었다면, 공정하지 않습니다. 『장화홍련전』의 숨은 비극입니다.

덧글

  • 남중생 2018/05/16 22:17 # 답글

    뇌법 포스팅을 할 때, 장화홍련을 삐딱하게(?) 읽을 여지가 있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지방 세력(좌수)이 중앙관료(사또)와 갈등하는 와중에 힘을 빌리기 위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보았죠.http://inuitshut.egloos.com/1891246
  • 解明 2018/05/17 20:01 #

    소설에서는 정동호와 배 좌수의 갈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아서(애초에 배 좌수가 뭘 해 보겠다고 나서는 인물로 그려지지 않았으니) 중앙 관료와 지방 토착 세력의 힘겨루기가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했네요.
  • 2018/05/17 08:1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5/17 20:0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초록불 2018/05/18 11:11 # 답글

    배 씨 부녀가 허씨의 시기심을 자극하는 행동을 오랫동안 벌인 점은 고려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 배좌수의 책임은 물을 수 있으나 장화와 홍련이 잘못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解明 2018/05/18 21:02 #

    "이 이야기는 잘 알려진 고려시대 목주가(木州歌)의 배경설화인데 이 설화가 보여주는 후모의 전처 소생에 대한 질시와 학대는, 자기 소생이 있든 없든, 남성 중심의 가정구조 속에서는 의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후처와 딸은 가부장을 중심으로 경쟁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는 소생이 있는 경우 전처 소생과 후처 소생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이 효녀설화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런 가족관계가 낳은 비극이고, 비극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말하자면 가부장의 사랑을 향한 경쟁에서 패배한 한 여성-효녀의 슬픔인 것이다. 나아가 슬픔의 이면에 깔린, 참언을 자행한 후모의 간교함과 아버지의 무분별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고려시대 설화가 보여주는 가족관계의 비극은 『장화홍련전』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하다."
    - 조현설의 「님성 지배와 「장화홍련전」의 여성 형상」에서

    장화·홍련 자매를 탓한다기보다 그들도 전처와 후처가 경쟁하는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지적하고자 한 것인데, 그게 글에 잘 반영되지 않은 듯합니다.
  • ㅇㅇ 2018/05/19 17:45 # 삭제 답글

    이런 pc잣대로 따지면 읽어야 될 옛날 전설 설화는 하나도 없겠네. 대단하신 진리성 간부 납셨다 그죠?
  • 解明 2018/05/19 17:51 #

    응, 아니야.
  • 2018/05/19 20:32 # 삭제 답글

    이렇게 볼 수 있군요.
    확실히 가부장의 문제는 제외해두네요.
    사씨남정기에도 이런 면이 있었나? 기억이 안나네요
    하여튼 이런 유형의 작품엔 다 그런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解明 2018/05/19 23:19 #

    『사씨남정기』는 처첩 갈등을 다뤘으므로 『장화홍련전』의 갈등 구조와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만, 둘 다 가정 소설로 묶이지요. 『사씨남정기』에서 악녀를 맡은 교채란이 처음부터 악행을 저지른 게 아니고, 주인공 사정옥과 점점 갈등을 빚으면서(어떻게 보면 사소한 일로 사씨가 트집을 잡아서 교씨를 꾸짖는 사건이 계기가 되어) 타락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소설을 읽으면, 당시 가족 제도의 모순과 문제가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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