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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송과 일본인들의 선배는 호종단? 역사

호종단이 죽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비양도의 전경(한국일보)

이곡의 <동유기>는 금강산 일대를 직접 여행하고 쓴 장문의 기행문이며 견문한 바를 자세하게 보고했다. 그런데 고성 삼일포에 이르렀을 때 신라 때 사선이 남긴 자취를 찾다가 예사롭지 않은 말을 들어 기록했다. 삼일포의 석벽에 '述郞徒南行石'(영랑의 무리가 남쪽으로 왔던 곳의 돌)이라는 여섯 자 단서(丹書)가 있어 술랑의 무리가 거기 이르렀음을 알려 주는데, 끝의 두 자는 흐릿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삼일포 안의 호수에 관해 "이 곳에 36봉이 있고, 봉에는 비가 있었는데, 호종단(胡宗旦)이 모두 물에 빠뜨렸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거기 이어서 쓰기를, 호종단이라는 사람은 이승(李昇) 때의 남당(南塘) 사람인데 우리 나라에 와서 벼슬하고 5도를 순찰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비갈(碑碣)을 가져다가 글자를 긁어 버리고, 부수고, 물에 넣기도 했으며, 종경(鐘磬)으로 이름 있는 것들은 쇠를 틀어막아 소리가 나지 않게 했다고 했다. 한송정·총석정·삼일포의 비와 경주 봉덕(奉德)의 종이 그런 수난을 당했다고 했다. 다시 강릉 경포대(鏡浦臺)에 갔을 때에도 "동쪽에 사선의 비가 있었는데 호종단이 빠뜨리고 거북 머리만 남았다"고 했다.

호종단은 중국에서 와서 고려에 벼슬한 실제 인물이다. 이곡은 호종단이 이승 때의 남당 사람이라 했는데, 남당은 당(唐)과 송(宋) 사이 중국 오대(五代)에 있던 나라이고 이승이 그 첫 임금이다. 이승의 재위 기간은 937년에서 942년이다. 그런데 《고려사》 열전에서는 호종단이 고려 예종 때 와서 벼슬하고 인종까지 섬겼다고 했다. 예종은 1106년에서 1122년까지, 그 뒤를 이은 인종은 1146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호종단의 생존 연대에 관한 이곡의 기억이 부정확하다고 하겠다. 열전에 기록된 바로는 호종단이 상선을 따라 고려에 와서 예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고, 왕을 풍자하다가 죄를 받게 된 사람을 구하고, 총민하고 글을 잘 하며 여러 가지 기예에 능통하다고 했다. 외직으로 나다닌 것 같지 않고, 비갈이나 종경을 망치는 짓을 했을 까닭이 없다. 그런데도 이곡이 전한 것과 같은 설화가 형성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아 마땅하다.

호종단은 설화에서 쉽게 기억되는 외국인 노릇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인이 우리 국토를 짓밟아 수난을 강요했다는 설화로 민족의 시련을 나타낼 필요가 있어 그 인물을 호종단으로 정하고, 한 짓을 문화재 파괴로 설정했다고 보아 마땅하다. 침략과 억압을 일삼는 몽고족을 바로 나타내기 어려워 과거의 인물을 하나 가져다 대고, 야만적인 살륙과 방화의 수난을 문화재 파괴로 넌짓 일렀다고 변형의 내막을 짐작할 수 있다.

배후의 숨은 의미를 캐는 데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제주 광양당(廣壤堂) 호국신의 이야기가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준다. 거기서 말하기를 호종단이 지세를 누르고 배를 타고 돌아가는데, 한라산 산신의 아우가 매가 되어 돛대 머리에 날아올랐더니 배가 풍랑을 만나 파선되고 호종단이 죽었다고 했다. 기록자는 의견을 붙여 믿을 수 없는 말이라고 하면서, 현지의 전승을 충실하게 전했다. 오늘날 제주도에서 이름이 흔히 고종달로 변한 호종단이 혈을 지르고 지세를 눌러 제주도에서 왕이 나지 않고 식수도 변변치 않다는 전설이 파다하게 전한다.

이곡이 <동유기>를 쓴 해는 1349년이고, 《동국여지승람》은 1486년에 간행되었다. 한 세기 정도 경과하는 사이에 전설이 많이도 변했다고 할 것은 아니다. 몽고 침략기에 제주도는 수난을 가장 많이 받았기 때문에 호종단이 땅의 혈을 질러 운세를 꺾었다는 이야기를 심각하게 했다고 보면 앞뒤의 사정이 모두 이해된다.

호종단 이야기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다시 일본인들이 우리 땅에 혈을 질러 장수가 나지 못하게 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녔고, 후대에 그렇게 변했다. 그런데 이곡이 전한 호종단 이야기는 금강산을 배경으로 하고 사선이 논 자취를 파괴했으면서 사선 전설과 연결되어 있다. 사선이 민족의 숨은 역량을 나타낸다면 호종단의 횡포는 민족의 수난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으므로 금강산에서 그 둘이 부딪쳤다는 것은 자세히 살펴야 할 심각한 의미가 있다.
- 조동일의 「대를 이어 섬겨 온 금강산」에서

국문학자 조동일 선생의 저서 『한국문학 이해의 길잡이』에 수록된 글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호종단 이야기는 이여송 설화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요즈음에도 전설처럼 떠도는 쇠말뚝 괴담의 원조에 해당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여송과 식민지 시기 일본인들보다 앞서 호종단이 우리 땅의 지맥을 끊는 악역의 대명사였던 셈이지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개정·증보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호종단 이야기가 그대로 실려서 조선 중기까지 꽤 유명한 전설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관련 자료).

인용문에 언급되었듯이 현재 제주도에서는 호종단이 섬의 혈을 끊었다는 전설들이 전합니다. 이 여러 전설 속에서 호종단의 이름은 '고종달' 또는 '고종달이'로 바뀌었고, 진(秦) 제국 시황제(始皇帝, 서기전 247~서기전 210) 시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서복(徐福)과 관련된 전설의 영향을 받은 모양입니다. 고종달이 맨 처음 닿은 제주도 땅은 종달리였는데, 지명이 자기 이름과 같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느껴 물의 혈을 끊었다는 식으로 문헌 자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용도 덧붙었습니다. 사서에 기록된 호종단의 행적이 크게 흠잡을 곳이 없음에도 왠지 후대 사람들에게 찍혀서 악인처럼 바뀌었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다만 호종단 말고도 고려로 건너온 외국인이 적잖은데, 하필이면 그를 나쁜 외국인 대표로 삼은 건 잡예에 능통하여 압승술(厭勝術)을 잘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동일 교수는 몽골의 침입으로 호종단이 반달리즘을 벌인 양 묘사되었다고 봤습니다. 이여송 설화가 임진왜란의 충격으로 나타나고, 쇠말뚝 괴담이 망국의 비극에서 비롯하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럴듯한 주장입니다. 삼별초(三別抄)의 최후 거점이었고, 그 뒤에 탐라총관부가 설치되어 원(元) 제국의 직할령이 된 역사를 간직한 제주도에 호종단 이야기의 변형이 유달리 많은 까닭도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면서도 한라산신의 아우가 호종단을 혼쭐냈다는 이야기가 따로 있어서 제주도 사람들이 외세의 침략에 좌절하지만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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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중생 2018/04/19 23:00 # 답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원나라가 남기고 간 인상이라고 읽는 것이 합리적이군요.
  • 解明 2018/04/20 11:51 #

    좀 더 좋은 해석이 있는지 생각해 봐야겠지만, 조동일 교수의 해석이 타당하다고 여깁니다.
  • 바람불어 2018/04/20 01:55 # 답글

    제주 신화 책 읽을 때 호종단이라고 잠깐 이름만 알고지나가서 . 호종단이라는 사람이 뭔가 잘못을 한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최소한 교만함으로 행패를 부리거나 그런 사소한 근거라도 있는줄 알았는데 아예 없었군요.
  • 解明 2018/04/20 11:57 #

    쌍철(雙哲), 쌍기(雙冀) 부자를 비롯하여 고려에서 활약한 외국인이 여럿 있음에도 굳이 호종단이 나쁜 놈으로 찍힌 건 본문에서 언급하였다시피 "잡예(雜藝)에 능통하여 자못 압승술(厭勝術)을 잘하니, 왕은 미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호종단으로서는 억울하겠지만, 그만큼 몽골의 침입이 고려 사회에 준 충격이 컸다는 방증이겠지요.
  • 도연초 2018/04/20 09:35 # 답글

    훨씬 더 전의 것으로 김유신과 소정방의 되다리 전설도...
  • 解明 2018/04/20 12:06 #

    http://db.history.go.kr/id/sy_001r_0020_0360_0190

    당교(唐橋) 전설은 소정방(蘇定方)이 외부의 침략 세력으로 등장합니다만, 호종단 이야기나 이여송 설화처럼 문화재를 파괴한다든가 풍수지리에 근거한 못된 짓을 벌인다든가 하지 않았으므로 쇠말뚝 괴담의 원류로 보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 백마강 조룡대 전설이 좀 더 비교할 만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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