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明의 수사학

explain.egloos.com

포토로그



조선의 기이한 이야기 독서

흥인지문 옆에 위치한 오간수문(五間水門)은 청계천이 한양 도성을 빠져나가는 곳이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수문이 없어서 복원이라고 하기 민망한 콘크리트 교량이 대신 들어섰지만,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청계천 준설 공사를 감독하는 현장을 그린 그림에서 오간수문의 옛 형태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림에 그려진 오간수문은 다리 아래에 다섯 개의 구멍을 내고, 거기에 철책을 세워서 사람이나 짐승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동대문 운동장이 있던 땅 아래에서 몇 년 전에 발굴된 이간수문(二間水門)도 그것과 비슷한 구조를 갖췄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 시대. 하루는 웬 구렁이 한 마리가 오간수문으로 들어오려고 하다가 몸통이 너무 커서 철책에 끼이고 말았습니다. 수문 근처에 살던 어느 무사가 그 광경을 보고 활을 쏴서 구렁이를 맞혔습니다. 구렁이가 도성에 들어와서 자칫 사람이라도 해치면 안 되니까 여기까지는 이해할 만한 일이었지만, 이 무사는 성격이 아주 거칠었나 봅니다. 죽은 구렁이를 굳이 개천에서 끌고 나와 작대기로 두들겨 짓이겼으니 말이지요. 요즈음이라면 언론에 나올 법한 엽기 행각이었습니다.

『준천계첩』에 그려진 오간수문(연합뉴스)

그로부터 얼마 뒤 무사의 아내가 임신하여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무사의 아들은 갓 태어났을 때부터 이상할 만치 아버지만 보면 성깔을 부렸는데, 아이가 나이를 먹을수록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나빠졌습니다. 무사도 아이와 마찬가지로 자기를 원수인 양 미워하는 아들에게 좀처럼 정을 붙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고, 방에 무사와 아이 단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무사가 바닥에 누워서 낮잠을 청하자 아이는 눈을 부릅뜨고 제 아비를 째려보더니 손에 단도를 들고 잠에 빠진 무사를 찌르려고 하였습니다. 일촉즉발의 순간, 무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아이에게서 칼을 빼앗았습니다. 사실 그는 잠든 척하면서 아이의 행동을 몰래 살피던 중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믿지 못하는 기막힌 관계임이 새삼 드러난 셈입니다. 아이가 괘씸스럽기 짝이 없던 무사는 큰 막대기로 아들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서 죽였습니다. 어찌나 세게 팼던지 살이 부서져 거의 뭉개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분이 덜 풀렸는지 무사는 아이의 주검을 방 밖에 내다 버리고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더 큰 사달은 그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혼자 남아 슬피 울부짖으며 이불로 시신을 싸 주었다. 염을 해줄 참이었다. 그런데 조금 뒤에 보니 이불 속에서 뭔가가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상해서 이불을 열어 보자 시체가 구렁이로 점점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반은 이미 구렁이가 된 상태였고 나머지 반은 아직 사람의 몸을 하고 있었다. 어미는 너무 놀라 뛰쳐나왔고 다시 가까이 가질 못하였다.

저녁이 되어 무사는 집에 돌아왔는데 가슴을 쓸어내리는 해괴한 일을 아내에게서 듣고 직접 이불을 펼쳐 보았다. 그랬더니 이미 구렁이로 완전히 변해 있었고, 대가리에는 화살촉이 박힌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

아이가 구렁이로 바뀐 끔찍한 모습을 보고서야 무사는 이 모든 게 자기가 애꿎은 구렁이를 죽인 사건에서 비롯하였음을 깨달았습니다. 무사는 옛날에 저지른 잘못을 스스로 털어놓으며, 원한으로 피가 피를 부르는 악연을 그만 끝내자고 구렁이를 설득합니다. 무사의 자식으로 태어나서라도 복수를 꾀한 구렁이도 그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엎드렸습니다. 무사가 문을 열어 주며 "이제 네 가고 싶은 데로 가거라"라고 알리니까 구렁이는 곧장 문밖으로 나가 마당으로 내려가더니 수문을 향하여 기어갔습니다. 철책 사이로 들어간 구렁이는 금세 몸을 감췄고, 더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듣기만 하여도 오싹한 이 이야기, 「무사의 집에서 구렁이가 자식으로 태어나다[武人家蟒妖化子]」는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대에 공조 판서를 지낸 임방(任埅, 1640~1724)이 쓴 『천예록(天倪錄)』(관련 정보)이라는 책에 실렸습니다. 17세기 전반에 엮어진 『어우야담(於于野談)』을 잇는 야담집인 『천예록』은 후대에 편찬된 『청구야담(靑邱野談)』 등에 견주면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내용이 두드러집니다. 이를테면 푸대접을 받자 요괴로 돌변하여 사람들에게 앙갚음한 할미나 예쁜 계집아이로 변신하여 평안 감사의 자제를 홀리려던 여우 같은 존재가 등장하여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지요. 『천예록』을 교감하고 역주한 정환국 교수는 임병양란의 충격이 작품에 녹아들었다고 여기는데, 실제로 책에는 어느 선비가 관왕(關王, 관우)의 도움으로 요괴를 물리쳤다거나 이름 모를 이인(異人) 덕분에 병자호란의 참화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그러한 추측이 타당하다는 근거가 됩니다.

여기에 더하여 저는 1670년과 1671년에 걸쳐 발생한 이른바 경신 대기근(庚辛大飢饉)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천예록』에는 유독 역신(疫神)이 나타나 역병을 퍼뜨려 사람들을 죽이는 일화가 많습니다. 게다가 이만지(李萬枝)라는 무사를 해하려는 괴물이 뜬금없이 배가 고프다고 말하는 대목도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이것은 경신 대기근의 비극을 반영한 흔적인 듯싶습니다. 그만큼 17세기는 기아와 역병 그리고 전쟁으로 얼룩진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제자로 노론에 속한 임방이 스승이 꺼렸을 법한 괴력난신(怪力亂神)에 깊은 관심을 보인 까닭은 시대의 격랑을 헤쳐 나가려는 그 나름의 방법은 아니었을까요? 성리학 체계를 묵수하면서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과 다른 흐름이 당시 정치권력의 한 축을 이루던 세력 내부에서 미묘하게나마 포착된다는 사실이 뜻밖이라서 흥미롭습니다.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첩』에 묘사된 평양식 마마배송굿(서울신문)

그렇지만 책 속에 우울한 풍경만 담긴 건 아닙니다. 오만불손한 어사가 관리와 기녀에게 속는 바람에 고을 사람들 앞에서 망신하였다든가 싸움터에서는 용맹스러운 장수가 알고 보니 아내에게 두들겨 맞는 공처가여서 파직되었다든가 하는 따위의 설화가 괴담 사이사이에 나와서 웃음을 줍니다. 또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지위와 재산을 버리고 어릴 적부터 사귄 옥소선(玉簫仙)이라는 기녀와 함께 야반도주하였다는 이야기는 『춘향전』 못지않게 낭만이 넘칩니다. 특히 젊은이가 서울로 돌아가면서 헤어지게 된 옥소선을 애써 잊고 살다가 갑자기 그리워져서 길을 떠나는 장면은 무척 아름다워서 인상에 남습니다.

이런 즈음, 감시과(監試科)를 본다는 방이 나붙었다. 아버지의 명대로 생은 친구 두셋과 함께 산사로 들어가 과업(科業)을 준비하게 되었다. 산사에 있던 어느 날 밤, 친구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을 때다. 생도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홀로 일어나 뜰 앞을 서성였다. 때는 한겨울이고 눈 내린 밤 달빛이 눈부시게 환한 데다가 깊은 산속의 고요한 밤이라 온갖 소리마저 잦아들었다. 생은 달을 바라보며 자란(옥소선을 가리킴 - 인용자)을 그리워하다 구슬픈 마음이 절로 일었다. 얼굴 한번 봤으면 하는 마음을 누를 수 없어 정신을 잃고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밤은 아직 반이나 남아 있었다. 급기야 그는 서 있던 뜰에서 곧장 평양을 향해 길을 떠났다. 털모자에 다 해진 명주옷을 입고 가죽신을 신고서 걸어서 길을 떠난 것이다.

물론 『천예록』에 실린 가지각색의 야담을 임방 혼자서 지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중국 전기 소설과 우리 서사 문학이 남긴 자산을 잘 물려받아서 갈고닦았다고 보는 편이 옳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본받은 부분이 눈에 띕니다. 수만에 이르는 귀신을 점검하는 사람은 귀신을 부리던 비형랑(鼻荊郞)을 떠올리게 하고, 서악 서원의 제향에서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빼자고 주장한 서생이 꿈에서 김유신에게 벌을 받아 죽었다는 이야기는 「미추왕 죽엽군(未鄒王 竹葉軍)」의 속편 격이라고 할 만합니다.

또한, 「표류한 섬에서 두 섬의 구슬을 줍다[海島中拾二斛珠]」는 여러모로 거타지 설화를 닮았습니다. 다만 두 이야기는 구조가 일치함에도 차이점이 적잖습니다. 거타지 설화의 거타지가 영웅적 면모를 지닌 명사수라면, 「표류한 섬에서 두 섬의 구슬을 줍다」의 주인공은 평범한 역관입니다. 거타지가 서해 용왕의 부탁을 받아 중으로 둔갑하여 용을 잡아먹는 늙은 여우와 맞서 싸운다면, 역관이 섬에서 마주친 이무기는 딱히 누군가를 괴롭히는 악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도 다릅니다. 이무기는 그저 섬과 바다를 오갈 뿐이지요. 따라서 수신이 사신단에서 역관을 골라서 무인도에 남게 한 이유도 불명확합니다.

활로 괴물을 잡는 거타지와 달리 역관은 머리를 써서 함정을 만들어 이무기를 죽입니다. 거타지는 늙은 여우를 없앤 보답으로 서해 용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되는데, 역관은 이무기의 사체에서 얻은 명주를 팔아서 나라의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공동체를 결합하는 구실을 하던 영웅 신화가 세월이 흐르면서 신성성(神聖性)을 잃고 세간의 이목을 끄는 데 목적을 둔 치부담(致富談)으로 바뀌었음을 보여 주는 일례입니다.

첨언 하나. 정환국 교수는 「무사의 집에서 구렁이가 자식으로 태어나다」의 배경이 된 수구문(水口門)을 사전에 나오는 풀이대로 광희문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석하였지만, "수구문이란 성의 바닥에 구멍 다섯 개를 내어 성안 광통교(廣通橋) 큰 냇물을 이 뚫린 구멍을 통해 흐르게 하"였다는 서술로 미루어 볼 때 이야기에서 가리키는 수구문은 광희문보다 오간수문으로 해석하는 쪽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덧글

  • 역사관심 2018/04/17 23:34 # 답글

    개인적으로 천예록의 '팬'인지라 몇편 소개한 적이 있는데 말씀대로 저 구렁이 이야기는 당연히 오간수문이 맞다고 읽고 있었는데 저런 주장도 있었군요.

    "반은 이미 구렁이가 된 상태였고 나머지 반은 아직 사람의 몸을 하고 있었다. 어미는 너무 놀라 뛰쳐나왔고 다시 가까이 가질 못하였다." 이 부분 너무 구체적이고 인상적이라 좋아합니다. ^^
  • 解明 2018/04/18 10:10 #

    네, 원문에도 '水口門'이라고 나오고, 조선 시대에는 수구문이 광희문을 가리켰는지라 정환국 교수도 그렇게 주석을 달았습니다. 하지만 본문 끝에 덧붙였다시피 수구문의 형태 묘사를 보면, 수구문은 광희문보다 오간수문으로 봐야겠지요. 그리고 사람이 짐승이 되는 다른 이야기 몇 개에서도 비슷한 묘사가 나오더군요.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