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明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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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치니 '억' 하며 죽었다 역사

서울대에서 열린 박종철 추모행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엄청난 격랑을 몰고 온 박종철의 죽음도 하마터면 전두환 정권에 의해 묻히거나 변색될 뻔했다. 역사는 필연과 우연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다고는 하지만, 6월 항쟁이라는 장대한 파노라마는 4월 혁명처럼 필연에 우연이 가미되었다. 그것의 단초인 박종철의 죽음이 알려진 데에도 우연희 요소가 녹아들어 있었다.

1987년 1월 15일 오전 10시경 중앙일보 사회부 신성호 기자는 대검찰청 청사에서 한 검찰 간부로부터 우연히 "경찰들 큰일 났어!"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이 실마리가 되어 서울대 언어학과 박 모라는 학생이 경찰에서 조사받다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쇼크사로 보도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서울대를 통해 박종철이라는 이름을 알아냈다. 신성호 기자는 돌아가던 윤전기를 세워 기사를 배치했다. 이렇게 해서 1월 15일 석간-『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당시 석간으로 발행되었다-중 오후 4시경에 받아볼 수 있는 2판인 서울과 수도권의 가정배달 신문 및 일부 가판에 박종철 사망기사가 실렸다. 생각해보면 대단한 특종이었으나 사회면 2단 기사로 나간 것이 전부였다.

동아일보는 이 보도를 보고 긴급히 취재에 나섰다. 그리하여 1월 15일자 지방판에 사회면에서 두 번째로 크게 기사를 내보냈다. 특종은 중앙일보가 했지만, 정작 큰 사건으로 다룬 것은 동아일보였고 이 기사는 외신으로까지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국가안전기획부는 신속하게 공보처를 통해 '보도지침'을 각 언론기관에 내려 보냈다. 사회면에 4단 이상 쓰지 말라는 '지시'였다.

이렇게 사건화가 되었는데도 검찰과 경찰 관계자들은 이날 오후 내내 아는 것이 없다고 잡아뗐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14일 아침 8시 10분경 하숙집에서 연행했는데, 밤사이 술을 많이 마셔 갈증이 난다며 물을 여러 컵 마신 뒤 심문 시작 30분 만인 오전 11시 20분경에 수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탁' 치며 혐의사실을 추궁하자 갑자기 '억'하며 책상 위로 쓰러져 긴급히 병원으로 옮기던 중 차 안에서 숨졌다.

이승만이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하고 나서 '사사오입'이라는 말이 이승만과 자유당을 조롱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는데, 전두환 정권 때는 '탁' 치자 '억' 하고 쓰러졌다는 명언이 나온 것이다.

1월 20일에 서울대 언어학과 사무실에서 추모식장까지 박종철 영정을 들고 가게 되는 정덕환은 이날 1월 15일자 『중앙일보』 기사를 우연히 봤다. 그리고 과 친구들과 울면서 술을 마시며 울분을 삭히느라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지만 당시 신문을 굵직굵직하게 도배질하던 학생공안 사건이나 건국대 사태 등을 자주 보던 때여서 친구의 죽음도 일과성으로 묻힐 거라고 생각했다. 박종철의 죽음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켜 역사의 전환점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1월 16일자 조간은 물론이고 저녁에 『중앙일보』를 본 사람도 이 사건이 곧 묻힐 거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이 사건이 변색되어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다. 다만 치안본부 직원들이 박종철이 안치된 영안실 주위에 있던 보도진을 비롯한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는 기사나, 기독교교회협의회NCC 고문폭력대책위원회(위원장 김상근 목사)에서 김근태 고문 사건 등 치안본부에 의해 계속되어온 고문사례에 비추어볼 때 쇼크사라는 치안본부 설명은 납득할 수 없다면서 고문살인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는 기사가 눈길을 끄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날 『동아일보』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 챘다. 우선 10, 11면에 관련 기사가 꽤 많았다. 11면은 사이드톱에 제목이 6단이나 되었고, 기사는 무려 10단이었다. 15일 밤 9시 5분에서 10시 25분까지 한양대 부속병원에서 안상수 검사의 지휘하에 황적준 집도로 사체부검을 했는데, 사체 오른쪽 폐에서 전기충격 요법이나 인공호흡 시 생길 수도 있는 출혈반이 발견되었다는 것, 부검을 지켜본 박종철의 삼촌 박월길이 머리 한쪽에서 피멍자국을 보았고 뒤통수·목·가슴·하복부·사타구니 등에 여러 군데의 피멍자국이 있었다고 말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분명 쇼크사가 아닌 고문사로 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는 이 날짜 사설에서 당국의 발표가 경악과 의문을 북돋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검에 참여한 가족들이 사체 온몸에서 수십 군데 피멍자국을 봤고 말한 것도 그렇고, 멀쩡한 청년이 갑자기 사망한 것도 상식으로는 정부 발표에 배치된다고 논박했다. 이 사설은 왜 박 군 죽음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숨겨왔는지 모르겠다며, 비극의 반복을 막고, 자식 가진 부모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사실을 숨김없이 밝히라고 역설했다. 할 말을 다 한 셈이었다.
- 서중석의 『6월 항쟁 - 1987년 민중운동의 장엄한 파노라마』에서

1987년 6월 항쟁을 그린 영화 <1987>이 얼마 전에 개봉한 덕분인지 올해는 박종철(朴鍾哲, 1965~1987) 열사의 31주기를 기리는 기사가 많이 눈에 띕니다. 십여 년 전에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뀐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는 추모객도 요즘 늘었다지요.

박 열사의 죽음을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기사는 겨우 2단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작은 기사가 '나비 효과'를 일으켜 전두환의 철권통치를 끝내 버렸습니다. 한 젊은이의 죽음이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군부 독재를 몰락하게 하는 계기가 되리라고 여긴 이가, 그때 몇이나 되었을까요?

하지만 민주화를 이루었으니 박종철 열사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왠지 머뭇거려집니다. 민주화 30년의 역사가, 특히 과거 10년간 벌어진 여러 사건을 뒤돌아보면, 박 열사가 그리던 '그날'은 아직 오지 않은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뒷맛이 씁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박종철 열사를, 그리고 이한열(李韓烈, 1966~1987) 열사를 새삼 기억하는 건 그저 영화가 흥행하여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지난 겨우내 1987년 체제의 빛과 어둠을 모두 지켜본 사람들의 마음이, 영원히 20대 얼굴로 남은 안타까운 청춘들을 현재로 불러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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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흑범 : 解明's comment's 2018-01-15 13:28: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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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마가린 2018/01/14 04:37 # 삭제 답글

    설인종 이종권 이석씨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죠 ㅋㅋㅋ
  • 解明 2018/01/14 11:17 #

    진짜 '억' 소리 나오게 하는 댓글이로군요.
  • 흑범 2018/01/14 22:29 #

    다행히도 정용철 전기동씨는 탁 쳤는데도 억 하고 죽지 않고 살아서 증언을 했지요.

    죽은 사람만 불쌍한 것입니다.
  • 15575 2018/01/14 15:51 # 삭제 답글

    한때 뉴벨의 이글루저들은 이것도 선동이라고 우겼었죠
  • 解明 2018/01/14 17:54 #

    누가 어떤 주장을 펼쳤는지 알지 못하니, 답변하기 어렵네요. 제가 뉴스비평 밸리에 들어가는 일이 드물기도 하고요.
  • 흑범 2018/01/14 20:05 # 답글

    어느 대학에서는 경찰관 7명을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무더기로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또다른 대학교의 정용철 전기동씨는 탁 쳤는데도 억 하고 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찰관들을 탁 쳤던 어떤 분들이나, 저 설인종 이종권 이석에게 전기고문과 코에 물먹인 가해자들이나, 정용철 전기동을 전기고문하고 코에 물먹인 자들은 전혀 사과하지 않네요.

    목적만 정당하면 과정은 어찌되었든 괜찮은 것일까???
  • 解明 2018/01/14 21:04 #

    애먼 사람 붙잡아 놓고 프락치로 몰면서 고문한 사람들 잘했다고 한 적 없어요. 그런 짓 벌인 운동권 출신들에게 사죄와 사과 요구하셔도 말리지 않습니다. 다만 맨 위에 댓글 쓴 사람이 정말로 설인종 씨 등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했다면, 'ㅋㅋㅋ'거리지 않았겠지요.
  • 흑범 2018/01/14 22:28 #

    설인종 이석 이종권을 조롱하는 댓글 같지는 않습니다. 조롱할 의도가 있다면, 자신들의 범죄는 싹 빼놓고 피해자인 양 행세하며 군사독재정권의 범죄만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는...

    "군사독재정권의 범죄만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는" 운동권 출신들을 조롱하는 것이겠지요. 아마도...

    악마 따라서 똑같은 악마가 되어서는 또다른 악, 새로운 악을 행하는 운동권 출신들 말입니다. 그러면서 천사 내지는 선량한 피해자, 일방적 피해자 행세까지 하는!!!

    뭐 저사람 댓글이야 어떻게 받아들이는거야 주인장 마음인 거고요.
  • ㅇㅇ 2018/01/14 21:18 # 삭제 답글

    운동권 애들은 포기했습니다.
    쟤들 인간되기는 걸렀어요.
    이제는 그냥 비뚫어진 꼰대의 모습만 남아있네요.
    잘가라 안녕~~
  • 解明 2018/01/14 21:54 #

    네, 안녕.
  • ㅇㅇ 2018/01/15 08:35 # 삭제 답글

    87년에 저렇게 맹활약 했다고 자랑하던 동아일보는 2016년 언론의난때 아예 상성을 해버렸지 ㅋㅋㅋㅋㅋㅋ
    오죽하면 신문사 고문이 에둘러서 깔정도로 ㅋㅋㅋ(대놓고 까는 셀프디스는 차마 못하고 ㅋㅋ)
    광우뻥때 맹활약한 "그 블로그"는 2관왕을 찍어주셨고 ㅋㅋㅋㅋㅋㅋ


  • 解明 2018/01/15 12:39 #

    박사모나 쓸 법한 '언론의 난' 운운하면서 '광우뻥'거리는 게 코미디. 그리고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니까요. 그만 좀 와요. 댁이랑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요.
  • 흑범 2018/01/15 12:49 # 답글

    ㅇㅇ//

    동아일보 기자들 중에 해직된 기자들이 한겨레신문에 몰려가거나, 경향으로 이동해 갔기 때문입니다.

    한겨레 창립멤버로 간 인물들도 있지만, 한겨레 창간멤버가 아니더라도 초기에는 관망하다가 한겨레가 어느정도 정착되자 동아일보에서 한겨레로 건너간 기자, 논객들도 꽤 됩니다.

    그리고 은근히 김성수 친일파 떡밥이 운동권들 사이에서 계속 전수되었고, 김대중 집권 초기에 동아일보를 대대적으로 세무조사해서, 김병관 회장 마누라가 자살한 사건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 사건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좌익에 적대적으로 변할 수 밖에...

    한때는 인촌이 이승만이나 자유당과 껄끄러웠고, 김상만 회장이 박정희, 전두환쪽 사람들한테 이런저런 견제를 은근히 받았는데도 말이죠.

    그리고 87년 88년부터 pc통신이 유행하다 보니, 굳이 기성 신문사에 기대지 않아도 자기 주장을 펼칠수 있게 된 것도 있었습니다. pc통신이 90년 초에 한참 유행하긴 했는데...
  • 흑범 2018/01/15 12:52 # 답글

    광우병을 비판하면 전부 박사모입니까???

    NL들에게 거부감을 가지면 전부 박사모들인지?

    새누리당-한나라당-민자당이 적어도 3~4개의 이질적인 집단, 계파가 섞인 존재라는 것은 전혀 인식하지 않나 봅니다. 오히려 그런 성향 때문에 조갑제 지만원 서정갑이나 그들의 전임자뻘인 선우휘 이도형 같은 사람들은 그 당하고도 어느정도 거리를 뒀는지도 모를텐데...
  • 解明 2018/01/15 12:57 #

    누가 광우병 비판하면 박사모라고 했습니까. 대다수가 인정하지 않는 '언론의 난' 같은 용어 쓰는 걸 문제 삼은 거지. 한 번만 더 엉뚱한 소리 하면 차단하겠습니다. 경고했습니다.
  • 解明 2018/01/15 13:56 #

    네, 핑백한 글 잘 보았고요. 경고한 대로 차단하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 ㅇㅇ 2018/01/15 15:04 # 삭제 답글

    응 관훈클럽 홈페이지 가서 17년 여름호 권두시론부터 읽고 박사모 타령하셔 ㅋ


  • 解明 2018/01/15 17:11 #

    네, 그쪽이나 많이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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