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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로서의 강화도 역사

광성보 손돌목돈대(연합뉴스)

본문에서 서술한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강화도가 과연 몽골군이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할 만한 요새였느냐 하는 점은 의문으로 남는다. 몽골군은 왜 강화도를 공격하지 않았을까? 하지 않은 것인가, 못한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몽골군이 강화도를 직접 공략할 의지를 표명하기 시작하자 바로 고려가 강화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강화의 장점만을 열거했지만 강화도도 사실은 심각한 약점이 있다. 첫째 너무 넓어서 외성을 따라 군사를 배치하려면 엄청난 병력이 필요하다. 강화의 천험을 찬양했던 최자도 최의가 죽자 바로 비관론으로 바뀌는데, 그가 지적한 방어상이 난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병력을 절감하기 위해 중성에 방어선을 펴려면 몽골군의 상륙을 허용해야 한다. 고려정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서 몽골군이 공격하려 하자 당장 이 문제가 거론된다.

몽골군이 해전에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해상을 봉쇄해서 강화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작전을 곤란하게 할 뿐이지 강화에 대한 직접 공격을 방해하는 요인은 되지 못한다. 강화 갑곶에서 육지 사이의 거리는 한강 정도에 불과하다. 배가 아닌 부교를 사용해서도 건널 수 있다. 몽골군은 세계를 정복하면서 이보다 넓은 강도 수없이 건넜다. 병자호란 때도 청나라 군은 하룻만에 이곳을 건넜다.

원래 이 세상에 완전한 요새란 없다. 공성작전은 전술적인 필요와 공격군이 감당할 수 있는 희생의 양과 투자액에 따라 결정이 된다. 잘 요새화된 성은 공격군의 투자 비용과 공성 기간을 늘리는 것이지 절대적인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강화천도와 고려의 버티기 작전도 몽골의 침략 목적과 대고려 정책, 고려왕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지 강화도가 절대적인 요새여서, 혹은 몽골군이 물을 무서워해서라는 관념적 선입견을 가지고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임용한의 『전쟁과 역사 3 고려후기편 - 전란의 시대』에서

1232년부터 1270년까지 고려의 임시 수도였던 강화도. 한반도 전역이 몽골군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와중에도 강화도는 안전하였습니다. 유라시아 세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몽골군이 강화도를 내버려 둔 까닭은 무엇일까요? 강화도를 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치지 못한 것인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한국역사고전연구소의 임용한 소장은 강화도가 많은 장점이 있는 난공불락 요새였음을 부정하지 않지만, 몽골군이 넘보지 못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버티기로 일관한 최씨 무신 정권의 대몽 항쟁 전략을 비판하는 임 소장의 시각이 어느 정도 반영된 듯한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여몽 전쟁 후반기 상황을 주된 판단 근거로 삼았다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화 앞바다가 그리 넓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느 물길보다 물결이 거세기에 배다리를 놓기 어렵습니다. 김포와 강화도 사이를 흐르는 물을 가리켜 염하(鹽河)라고 하지만, 염하는 엄연히 강이 아닌 바다입니다. 몽골군이 염하보다 넓은 강을 수없이 건넜을지는 몰라도, 염하보다 거친 강을 건넌 일은 드물지 않았을까요? 또 고려 시대부터 간척 사업을 거듭하여 상전벽해 수준으로 강화도 지형이 바뀐 병자호란 당시와 여몽 전쟁 시기를 직접 비교하는 것도 문제라고 봅니다. 무엇보다 청(淸) 제국은 물에서 싸울 줄 아는 한인(漢人)들을 앞세워 강화도를 공략했기에 남송(南宋)을 점령하기 이전 몽골 제국과 사정이 아주 달랐습니다. 몽골군은 1250년대부터 전라도 일대의 여러 섬을 치면서 수전 경험을 쌓았지만, 그들이 강화도를 칠 만한 수군 전력을 갖추기 전에 전쟁이 끝났습니다.

섬에 틀어박혀 뭍에 사는 백성들이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행동한 최우(崔瑀, 최이) 등 고려 지배층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강화도의 방어력을 굳이 낮춰 볼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요새란 없으나, 막강한 몽골군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지형지물을 모조리 극복할 만큼 완벽한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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