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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한 반노들에게 피의 복수를! 독서

『김학공전』(관련 정보)은 조선 후기에 출현한 추노담(推奴談)을 소설화한 작품입니다. 18세기에 활동한 학자인 안석경(安錫儆, 1718~1774)의 『삽교별집(霅橋別集)』에는 이 소설과 줄거리가 비슷한 글이 실려서 신분제가 허물어지던 시대에 이러한 이야기가 성행했음을 알려 줍니다. 다만 『김학공전』은 방각본으로 출간된 일이 없어서 안석경이 살았을 때보다 한참 뒤에 쓰인 듯합니다. 현재 전하는 필사본들은 20세기 이후의 것들이어서 일러도 19세기 후반에 소설이 쓰였다고 생각하는데, 그로 인해 서사 구조에 적잖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야담에서 중심인물은 이름조차 나오지 않아서 '궁한 선비[窮士]'로 불립니다. 야담을 기록한 안석경은 궁한 선비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그가 반노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사건을 흥미롭게 이야기할 뿐입니다. 반면에 『김학공전』에서 궁한 선비와 똑같은 시련을 겪은 인물과 그를 돕는 노비 처녀에게는 각각 김학공과 김별선이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글쓴이는 당시 큰 인기를 끌던 영웅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영웅의 일생' 구조에 가깝게 이야기를 꾸미면서 김학공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주인공의 삶 전체를 그렸습니다. 가족 관계가 어떤지 알 수 없는 궁한 선비와 달리 김학공은 부모 형제와 함께 살았다고 설정했기에 그의 가족에 얽힌 사연도 제법 비중 있게 다뤘습니다.

한편 야담에서는 노비들이 궁한 선비를 잔인하게 살해하려고 했다는 것으로 주인을 향한 노비들의 반감은 보여 줬지만, 노비들이 모반한 계기는 따로 서술하지 않았습니다. 궁한 선비가 말 그대로 궁한 처지라서 없애도 뒤탈이 없으리라고 판단해서 그랬는지 옛날에 궁한 선비에게 천대받은 적이 있어서 한풀이하려고 그랬는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겼습니다. 『김학공전』은 박명석이라는 자의 입을 빌려 노비들이 주인을 배반한 까닭을 좀 더 뚜렷하게 밝혀서 야담과 다릅니다.

"우리가 매양 남의 종노릇만 한단 말인가. 지금 상전이 부인과 어린아이뿐이라. 이때를 틈타 상전을 다 죽이고, 세간 재물을 다 수탐하여 가지고 무인 계도 섬에 가 양반이 됨이 어떠한고?"

김씨 가문의 노비들이 남의 종노릇이나 하는 신세에 염증을 느껴서 모반을 일으켰음을 짐작하게 하는 발언입니다. 김학공의 아버지 김태는 소년등과를 한 명문가 자손임에도 관직 생활을 일찌감치 접고 귀향한 사람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서술자가 김태를 가리켜 "농부·어옹이 되어 한가롭게 지냈다"라고 하면서도 "농업에 힘써 가산이 부요"하다고 이야기했다는 점입니다. 얼핏 앞뒤가 안 맞는 서술같지만, 김태가 재물을 모으고 부를 쌓는 과정에서 노비들을 혹사했다고 가정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소설 속에서 김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지 않으며, 죽어서도 아들을 돕는 조력자로 활동하므로 이것은 지나친 상상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김태가 죽음을 앞두고 "허다한 노비·전답을 주장무인하겠으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하리오!"라고 탄식하는 대목은 왠지 뒷맛이 씁니다. 자기가 마을 사람들에게 '김 장자'로 불릴 만큼 큰 부자가 된 것은 많은 노비가 노동력을 제공한 덕분임을 김태도 알았음을 암시하는데, 그게 아름답게만 이루어진 일이었다면 "세사를 생각하매 흉격이 막히어 설화를 다 못하겠노라"라고 말했을까 싶습니다. 46세라는 조금 이른 나이에 처자식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슬픔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더라도 반노의 등장을 예감하는 유언을 남긴 것은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드라마 <추노>의 포스터(KBS)

김태가 생전에 노비들을 어떻게 다스렸든 김씨 가문 노비들은 반역을 실행에 옮기고자 합니다. 박명석이 선동해서 들고일어난 노비들이 살인을 꾀하고 방화를 저지르면서 소설의 갈등은 상전과 노비의 대립에서 선과 악의 대립으로 옮겨 갑니다.

그런데 김학공의 어머니 최씨 부인은 유모의 고변으로 반노들의 심상찮은 움직임을 미리 알아채고도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노비들을 속량해 줘서 목숨을 지킬 길을 잠깐이나마 떠올린 것을 보면 최씨 부인은 현실에 그리 어두운 인물은 아닌 모양이나, 백발노인이 꿈속에 나타나 살아남을 방법을 일러 줘도 좀처럼 결단을 못 내리고 우물쭈물할 정도로 무력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주인공 김학공도 최씨 부인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맞는데, 그럴 때마다 기적이 잇달아 일어나서 위기를 넘깁니다. 기적과 우연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전개는 신분제가 붕괴하는 흐름을 막을 수 없음을 시사하는 듯합니다.

이렇게 『김학공전』의 글쓴이는 지난날 주인과 노비의 힘이 역전된 상황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은 게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노비 해방이 거스를 수 없는 현실임을 모를 만치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작중에서 김동지는 어디에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김학공을 사윗감으로 탐탁지 않게 여기는 아내에게 왕후장상이 씨가 있느냐고 꾸짖기도 하고, 사대부가의 여식인 임 낭자보다 노비 출신인 별선이 김학공의 부인으로서 위치가 더 두드러집니다. 김씨 가문에 끝까지 충성을 바친 두 여종을 속량한 것에서도 글쓴이가 노비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알 법한 부분입니다. 요컨대 과격한 변화는 반대하되 온건한 변화까지 거부하지 않은 셈입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인지 몰라도 상전에게 대들고 도망한 노비들을 처벌하는 장면은 대단히 잔혹합니다.

그놈들이 이 말을 들으매 대경실색하여 아니 떠는 놈이 없더라. 이윽고 북소리 나며 군병이 일시에 고함하고 달려들어 차례로 베니, 머리가 추풍낙엽같이 떨어져 주검이 뫼 같고, 피 흘러 내와 강이 되었더라.

자사가 다시 분부하여 왈,

"그놈들 집에 가서 재물을 다 가져오고, 어린아이라도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죽이고, 그 집은 다 불을 지르고 오라."

하셨다. 그 군졸들이 듣고 일시에 내달아 재물을 다 가져오고, 집을 다 불 지르고 돌아온 후에 보매 재물이 태산 같았다.

관군을 동원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반노들을 학살하는 김학공은 그야말로 복수에 미친 사내입니다. 충노에게는 자유로 보답하겠지만, 반노에게는 복수로 응답하겠다는 메시지를 명확히 한 것이지요. 『임경업전』이나 『유충렬전』 등 원수를 죽여 원한을 갚는 내용이 나오는 고소설은 흔하지만, 대개 간신과 외적처럼 악인이 복수의 대상이 될 뿐이지 직접 죄를 저지르지 않은 어린아이까지 죽이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그래서 몇몇 학자는 『김학공전』을 '복수 소설'로 평가하기도 하지요. 이처럼 『김학공전』은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시대의 세태를 어느 정도 반영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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