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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특질은 무엇인가? 독서

모어 화자 수를 기준으로 하면, 우리말은 전 세계에서 10위권에 들어가는 언어입니다(관련 자료). 지구에서 쓰이는 언어가 적어도 수천 개가 넘으니 규모가 제법 크다고 할 수 있지요. 그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말에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심지어 우리말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언어라고 상찬하는 이도 적잖지요. 물론 우리말 사랑을 아낌없이 나타내려고 꺼낸 말이겠습니다만, 모든 언어는 저마다 아름답고 훌륭하기에 실제와 동떨어진 과장된 평가는 오히려 우리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을 가로막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말의 아름다움 또는 훌륭함과 이어지기 마련인 우리말의 특질은 무엇일까요?

몇 가지만 생각나는 대로 꼽아 본다면, 형태론적으로 교착어라서 문법적 기능을 가진 어미와 조사가 풍부하다거나 통사론적으로 SOV형 언어라서 어순이 주어, 목적어, 서술어 순이라거나 높임법이 발달했다는 점이 우리말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할 만합니다. 웬만한 문법서라면, 이 같은 내용을 간략하게라도 짚고 넘어갑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말의 이런저런 특질을 다룬 김동소 교수의 『한국어 특질론』(관련 정보)은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세계의 여러 언어와 견주어 우리말의 특질이 무엇인지 밝히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문법서들이 영어나 일본어처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언어와 우리말을 비교하는 경우가 보통인 것과 달리 이 책에서 김 교수는 구아라니어, 니브흐어, 케추아어처럼 일반인에게 이름조차 생소한 언어들까지 예로 들어 우리말과 무엇이 같고 다른지 설명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별 언어로서 우리말의 특수성과 일반 언어로서 우리말의 보편성이 더 잘 드러납니다.

가령 우리말 어휘 체계에서 한자어 숫자가 절반 이상인 것을 우리말의 한 특질로 지목하는 학자가 많지만, 이른바 한자 문화권에 속한 일본어와 베트남어 등에도 한자어가 다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아울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세를 크게 떨치는 언어와 오랫동안 접촉한 언어는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차용 현상이 흔히 일어납니다. 터키어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한때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핀란드의 언어에도 그 역사의 흔적이 짙게 배었습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힘센 언어인 영어도 예외가 아니어서 라틴어와 프랑스어에서 빌린 단어가 무수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김 교수는 "한자어의 많음이 한국어 어휘의 고유한 특질이라 말하기에는 논리적인 어려움이 있다"라고 지적합니다.

'ㆍ' 문자의 음가를 해설한 『훈민정음』의 일부(디지털한글박물관)

이렇게 우리말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이 특질인지 아닌지 분석한 내용은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한국어 특질론』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아래아('ㆍ')를 김동소 교수가 과거와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어 특질론』이 나오기 이전에 쓴 『중세 한국어 개설』과 『한국어 변천사』를 보면, 김 교수는 15세기까지 아래아 모음이 음소는 아니었으되, 'ㅡ'와 대립할 수 있도록 만든 문자 'ㆍ'가 훈민정음을 보급하는 과정에서 널리 쓰이자 아래아 모음이 인위로 음소가 됐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러한 주장만 하더라도 아래아 모음의 음가가 어떠했는지 이견은 있을지언정 고대로부터 아래아 모음이 음소였음을 의심하지 않는 통설과 사뭇 다르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아래아 모음이 국어사에서 음소가 된 일은 없었다고 하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담대한 가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ɵ] 또는 [ʉ] 음은 15세기 당시 음소로 존재했던 음이 아니었음에도, 음양설에 입각해 'ㅡ'에 대립할 수 있도록 'ㆍ'라는 문자를 만들어, 변이음으로만 존재했던 [ɵ] 또는 [ʉ] 음과 가까운 음들을 나타내는 일을 담당시키려 한 셈인데, 새로 문자를 만들어 보급시키던 당시로서는 이러한 'ㆍ'의 인위적 표기가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방언에 따라 모음이 달리 발음되는 낱말들, 예컨대 '마슬, 마실, 마알, 마울, 머얼, 모술, 모슬, 모실, 모울, ㅁㆍ슬' 등의 어형에서 모음 'ㅏ, ㅓ, ㅗ, ㆍ [제1 음절에서]; ㅏ, ㅓ, ㅜ, ㅡ, ㅣ [제2 음절에서]' 등을 절충 통일 표기한 'ㅁㆍㅿㆍㄹ'과 같은 어형을 만들어 기록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방언에서 존재하지 않는 소리였으므로, 표기는 'ㅁㆍㅿㆍㄹ'이라고 해 놓고서 실제 발음은 자기의 방언에 따라 각각 다르게 소리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략)

결국 'ㆍ'는 20세기까지 표기에서는 활발히 쓰였지만 실제로는 말하는 이의 방언음에 따라 발음되었다는 말이고, 서울 지방의 경우 제1 음절에서는 주로 'ㅏ'로, 제2 음절 이하에서는 주로 'ㅡ'로 발음되어 왔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15세기 중반 이 글자를 제정할 때부터 20세기 초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 이 글자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할 때까지 한 번도 음소화하지 못하고 표기에서만 사용되어 왔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김 교수는 아래아 모음의 비음운 가설을 내놓으면서 중세 국어 초기인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대와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대에 나온 문헌들에 보이는 예외 표기를 근거로 삼았습니다. 표기법을 엄격히 지킨 중세 국어 초기 문헌들에서 'ㆍ'가 'ㅏ', 'ㅡ' 등과 뒤섞여 적힌 용례를 뜻밖에도 자주 찾을 수 있는데, 아래아 모음이 음소였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리라고 김 교수는 주장합니다. 이것은 앞서 말했다시피 통설을 뒤집는 것이라서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그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래아 모음의 비음운 가설은 『한국어 변천사』의 개정판인 『한국어의 역사』에도 반영되면서 김 교수 특유의 국어사관(國語史觀)을 이루는 중심 요소가 됐습니다(관련 글). 이 책을 읽고 보람을 느꼈다면, 『한국어의 역사』를 이어서 읽어 봐도 좋을 듯합니다.

첨언 하나. 일부 옛 한글은 풀어쓰기로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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