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明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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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의 실패, 가나의 성공 그리고 한글 언어

이와 같이 한자에서 음절문자를 만들어 두 나라가 다 같은 경로를 밟아 거의 같은 결과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로써 성공적으로 그들의 말을 적게 되고, 우리는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자에서 탈피한 글자는 한자의 성질상 음절글자가 될 가능성이 많다. 한자는 한 글자가 원칙적으로 한 낱말을 표기하며, 그것은 한 음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말의 음절의 수는 '50음도'대로 하면 50이다. 그러나 옛말에서는 홀소리가 다섯 이상이었고, 또 탁음이 있기 때문에 그 수는 약간 늘어나지만, 그리 크게 늘어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음절의 짜임새는 매우 간단하여서, 한 음절은 홀소리 하나로 되든지, 닿소리 하나와 홀소리 하나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음절을 한자로 적으려면 그에 해당하는 한자 100 가량만 있으면 충분하다. 더구나 그들은, 음절의 끝소리가 없기 때문에, 끝소리가 있는 한자를 끝소리를 빼어 버린 음으로써 차용하였으니('安'으로 'a'를 표기한 따위), 빌어쓸 수 있는 한자는 매우 많다.

그러나 우리는 사정이 이와는 전혀 다르다.

현대 국어로써 생각해 보면, 이론적으로 산출될 수 있는 음절의 수는 3천이 넘는데, 실지로 쓰이고 있는 음절 수는 1천 정도이다. 일본에 비하면 10배가 넘는 셈이다. 거기에다 우리말의 음절에는 끝소리가 있다.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가운뎃소리가 지금보다 더 많은 데다 「ㅄ, ㅳ, ㅺ, ㅻ, ㅴ」 따위 첫소리가 있었다.

물론 우리가 한자를 빌어쓰던 그 당시에 있어서는 우리말의 음절 짜임새가 어떠했었는지 잘 알 수 없으나, 그 근본적인 성질은 그리 다르지 않았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자로써 우리말을 적는 것은 일본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우리가 한자로써 음절글자 만들어 쓰는 데 실패한 이유가 있다.
- 허웅의 『국어학 - 우리말의 오늘·어제』에서

근대 언어학이 향찰로 적힌 향가를 해독한 지 어느덧 백 년 가까이 됐으나, 천년 전에 불린 노랫말을 옹글게 되살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학자들이 향찰 연구를 거듭한 덕분에 체언이나 용언의 어간 같은 실질 형태소는 훈독자로, 조사나 어미 같은 형식 형태소는 음독자로 적혔다는 것을 밝혀냈지만, 이른바 훈주음종(訓主音從)의 기준은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 때문에 어느 글자를 새김으로 읽고 소리로 읽어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같은 글자라도 학자마다 다르게 읽기 일쑤라서 어떻게 해독한 것이 옳은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가령 득오(得烏)가 지은 <모죽지랑가>의 첫 번째 구절인 '去隱春皆理米'를 읽는 법 하나만 봐도 향가 해독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去隱春'을 '간 봄'으로 읽는 데 이견을 보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春' 뒤에 'ㅁ'을 나타내는 '音' 자가 붙지 않아서 '春'을 '봄'으로 읽어도 괜찮은지 좀 망설여지지만, 역시 '봄'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해독이 수월한 편입니다. 반면에 '皆理米'는 어떻게 읽어야 할지 참 난감합니다.

『삼국유사』에 실린 <모죽지랑가>의 노랫말(한국사데이터베이스)

향찰 해독의 '쌍두마차'인 양주동(梁柱東, 1903~1977) 선생과 김완진(金完鎭, 1931~) 선생은 이 부분을 각각 '그리매'와 '모도리매(못 오리매)'로 읽었습니다. 양주동 선생이 세 글자를 모두 음독해서 읽은 것과 달리 김완진 선생은 첫 글자인 '皆'를 훈독해서 읽었기에 해독이 사뭇 다릅니다. 누가 옳을까요? 먼저 양주동 선생의 해독을 살펴보면, 훈주음종의 기준을 어기고 '皆理米' 석 자를 내리 음독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또 '그리다'의 어간 '그리-'를 '慕理'로 표기한 <모죽지랑가>에서 '慕理'를 버리고 '皆理'로 '그리-'를 표기했을 성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김완진 선생의 해독을 받아들이기도 어렵습니다. '皆'를 '모도(>모두)'로 훈독한 다음에 이것을 부정 부사 '몯(>못)'과 동사의 어간 '오-'로 쪼갠 것은 굉장히 복잡한 분석입니다. 더욱이 두 번째 구절에 나오는 '毛冬'이 부정 부사 '몯'을 표기했다고 본 김완진 선생이 '皆'를 '몯+오'로 분석한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毛冬' 대신에 굳이 '皆'로 부정 부사를 나타냈다고 한다면, '慕理'를 버리고 '皆理'로 '그리-'를 표기했겠느냐는 비판이 무색해지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신라인이나 고려인이 '去隱春皆理米'를 '간 봄 그리매'나 '간 봄 못 오리매'로 읽었을 가능성은 작아 보입니다.

현대인인 우리보다 사정은 나았겠지만, 옛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훈독자와 음독자를 정확히 가려 향찰을 매끄럽게 읽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듯합니다. 한자 지식을 웬만큼 갖추지 않고서야 향찰을 능숙하게 쓰기 어려웠을 테니까 말이지요. 가장 발달한 형태의 이두임에도 향찰이 고려 중기 이후에 명맥을 잇지 못한 것은 사용법이 너무 까다로운 탓이었습니다. 그리고 맨 앞에 인용한 글에서 설명한 대로 향찰의 근간이 된 한자가 우리말 음절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도 향찰이 소멸하게 된 원인이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향찰의 소멸이 우리에게 큰 불행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향찰이 사라짐으로써 한글이 등장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향찰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쓰였다면, 우리도 일본인들처럼 가나 같은 문자와 한자를 섞어서 글을 썼을지 모릅니다. 결과론에 가까운 말이겠지만, 향찰의 소멸은 우리에게 축복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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