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북아역사지도가 정말 문제일까?(동아일보)
"다음으로 한사군이 우리 나라 안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한사군이 없었다면 좋을 것 같지만 한사군이 없었으면 고구려사와 백제사의 역사적 과제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던 식민지를 내몰고 고대국가를 성립하는 것이 고구려 역사의 사명이고 백제 역사의 사명이었다. 한사군이 없었다면 한사군과 싸우는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모름지기 주체의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날 현대문화를 건설해 나가는 데 험로와 한계를 느끼지 않는가. 이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부단히 극복해 나가는 것이 주체성 확보의 전제이다. 자기 한계성을 극복해 가면서 생활능력을 증대하는 활동을 할 때 역사의 주체성과 정통성이 있는 것이지, 단군만 이야기하고 연대만 올린다고 해서 누가 주체성과 정통성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 윤종영의 『국사교과서 파동』에서
1981년 충격과 공포의 '국사교과서 파동' 당시 김철준(金哲埈, 1923~1989) 선생의 발언 가운데 일부입니다. 한사군을 식민지에 빗댄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낙랑군을 비롯한 이른바 한사군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고 말하면 일제의 식민 사관에 동조하는 것인 양 몰아붙이는 이들을 잘 비판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漢)이 위만 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땅에 군현을 설치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면, 한사군이 한반도 밖에 있으면 식민 사관이 아니고, 반대로 한반도 안에 있으면 식민 사관이라는 식의 논리는 이상합니다. 정작 식민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었다고 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 뒤틀린 논리는 여전히 되풀이됩니다.
요즈음 동북아역사재단이 만드는 '동북아역사지도'에 대한 공격이 거셉니다(관련 기사). 이덕일 씨 등 이를 선도하는 사람들은 낙랑군과 대방군 등을 한반도 북부에 그린 게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미 지도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한 학자들이 국회의원들 앞에 불려 나가 높으신 분들에게 호통과 질책을 들었으니 국사교과서 파동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인데, 식민사학자에 동북공정 추종자라는 꼬리표가 하나 더 붙었다는 게 1981년과 다르다면 다른 점입니다. 이덕일 씨의 주장은 고고학 발굴로 드러난 증거까지 무시할 만큼 문제가 적잖지만, 자극적인 말로 대중의 민족주의 감정에 호소하는 전략은 제대로 먹혀 동북아역사재단을 비난하는 여론이 높습니다. 3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언론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고 부화뇌동하며, 논란을 더욱 부추깁니다. 그야말로 역사학을 넘어서 인문학의 위기입니다.
덧글
한사군은 요하로 몰아내면서 정작 그당시 한반도 북부엔 뭐가 있었나 말도 안하잖아요.
신라는 요서랑 요동 중간에 끼어 있던데 왕이 죽을때 되면 경주로 가는가 봅니다ㅋㅋ
하나에서 열까지 말이 안되던데 거의 종교적 믿음의 영역이라 지적이 불가능해보였습니다...
군현의 관리는 중국 본토에서 파견했지만,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점차 약화하면서 토착 세력인 원주민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토착민 출신인 왕조(王調)가 반란을 일으켜 낙랑 태수를 죽이고 자신의 정권을 세웠을 정도였지요.
낙랑군은 식민지라기보다 중국 변방의 군현으로, 중국에서 동이로 부른 주변 세력과 무역을 하는 중계지나 창구 기능을 하는 곳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군현을 유지하고 중계 무역을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주변 지역인 예맥, 옥저 등의 성장을 억제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제가 낙랑군을 식민지에 빗댄 것에 동의하지 않는 까닭은 이렇습니다. '정신승리'라는 표현은 지양하셨으면 합니다.
몽골족에게 끝까지 저항하여 자주성을 지키고 속국을 면했다는 고려 때랑 주장이 똑같잖아요
그러니깐 바이칼까지 고조선이 깃발 꼿아서 관리가 가능했다는 망상도 가능한거겠는데, 현대와 고대의 문명 수준이 다름을 인식해야 합니다
고조선이 러시아 수준의 확장능력을 가졌다는 것과, 고대 한나라가 총독부를 둘수 있었다는 주장이나 매한가지라 봅니다
그리고 똑같이 댓글이 여러 개 잇달아 달려서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삭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