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학의 세계를 거닐다 독서(讀書)

제가 대학교에서 국어학을 처음 배울 무렵에 읽었던 개설서는 이익섭 교수가 쓴 『국어학개설』이었습니다. 아직 손때가 묻지 않아 새하얀 책을 펼쳤던 그때를 떠올리면 문득 봄날을 느낍니다. 그때 책을 읽었던 곳이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어느 창가 앞이기도 했지만, 초판 서문에 적힌 다음과 같은 글이 제 마음을 두드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앞에는 一石(일석) 선생님의 『國語學槪說(국어학개설)』이 놓여 있다. 선생님께 직접 배우던 손때 고운 책이다. 목요일 오전까지 교양과목을 마치고 그 오후 구름다리를 넘어가 선생님의 따사로운 강의를 듣던 감개가 새롭다. 꼭 30년 전의 일이다. 공부를 하였으면 꽤 하였을 세월인데 이 책을 쓰면서 자신의 공부가 너무 얕음이 못내 부끄럽고 안타까웠다."

여기에서 '손때 고운 책'과 '따사로운 강의'라는 말이 저는 참 좋았습니다. 스승인 이희승 선생을 존경하고 학문을 사랑하는 이익섭 교수의 마음이 그대로 와 닿았습니다. 소설이나 시가 아닌 대학 교재에 실린 글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년 가까이 곁에 두고 읽은 책이지만, 아직도 저는 이 책을 다시 볼 때마다 초판 서문은 꼭 읽고 넘어갑니다.

이제 추억처럼 제 앞에 높여 있는 책을 다시 읽습니다. 국어학의 세계로 저를 이끌었던 그 길을 오랜만에 걷습니다. 옛날에는 미처 못 봤던 것들이 이제는 눈에 띄고, 옛날에는 곁눈질로 스쳐봤던 것들이 새삼 새롭게 보입니다.

길 어귀에서 '국어'라는 말을 만납니다. 문자만 보면 'national language'라는 뜻을 지녔을 것 같은 '국어'가 'Korean language'라는 뜻을 지녔고, 한국과 일본을 빼면 '국어'라는 말을 쓰는 나라가 그리 많지 않음을 처음 알았을 때 받았던 충격이 또렷이 떠오릅니다. 오랫동안 문제의식 없이 입에 담았던 말이었기 때문이지요. 이익섭 교수는 '국어'라는 말을 굳이 꺼리지 않았지만, "좀더 객관성을 부여하여 '한국어'라 불러도 좋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교과를 가리키는 국어와 우리말을 가리키는 국어를 되도록 구별해서 부릅니다. 전자는 그냥 '국어'라고 부르지만, 후자는 '한국어'나 '우리말'이라고 부릅니다.

이익섭 교수는 초판 서문에서부터 "언어학 일반의 視野(시야)에서 국어학을 바라보는 눈을 첫걸음부터 길러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라고 강조하며, 본문에서도 "국어학도(國語學徒)는 동시에 언어학도(言語學徒)라는 사실도 따라서 늘 명심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는데, 언뜻 문제없어 보이는 '국어'가 품은 속뜻을 짚고 넘어간 것은 국어학과 언어학을 떨어뜨려서 보지 않는 이 교수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언어학 일반 시야"에서 '국어'를 살펴보지 않았다면, 객관성을 따질 까닭은 없었을 테니까요.

국어학은 개별언어학 가운데 하나이므로 언어의 보편성에 바탕을 둔 국어학 공부를 강조하는 일은 군소리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국어학의 세계만 벗어나면 길을 잃고 헤매는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한국어에는 있는 음운이 프랑스어에는 없고, 한국어에는 없는 품사가 영어에는 있다는 것을 안다면, 한국어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겠지만, 국어학의 울타리를 넘어 언어학의 세계를 관찰하는 국어학도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이는 근대 학문의 전문화가 불러온 폐해겠지요. 그런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익섭 교수는 다음과 같이 드러냅니다.

"학문의 분야가 세분화되어 온 것은 학문의 깊이가 점차 깊어지면서 처리하여야 할 정보(情報 information)의 양(量)이 늘어나고 복잡해짐에 따라 우리의 능력이 여러 분야를 감당하기 어렵게 됨으로써 결과된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각 분야가 이웃 분야와 관련 없이 고립되어야 한다든가, 또는 고립될 수 있다는 뜻일 수는 없다. 오히려 너무 세분(細分)된 나머지 독자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수준에 한계가 있음이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근래에 와서는 학문간의 제휴(提携)의 필요성, 즉 이른바 학제적(學際的 interdisciplinary) 연구의 중요성이 점차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국어학(내지 언어학)도 예외가 아니다. 이쪽이 도움을 받아야 할 분야도 많고 또 이쪽의 성과(成果)로부터 도움을 받아 갈 분야도 많다."

다시 말해서 더 넓고 멀리 바라봐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되새김질하듯 곱씹어 볼 말입니다. 국어학뿐만 아니라 언어학 입문서로 『국어학개설』을 추천하는 사람이 많은 까닭은 국어학과 언어학을 넘나드는 이익섭 교수의 균형 감각이 빛나기 때문은 아닐까요?

개설서인 만큼 『국어학개설』은 특정 이론에 치우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여느 국어학 개설서와 마찬가지로 음운론, 문법론(형태론과 통사론), 의미론 등을 두루두루 다룹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익섭 교수 개인의 주장이 드러나는 내용이 없지는 않습니다.

이익섭 교수는 "결국 국어에는 부사절이 있을 뿐 그와 대립되는 종속절은 없다는 결론이 된다. 그렇다면 종래의 연결어미 중 많은 부분은 부사형어미(부사화어미)로 이름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부사형 어미를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나중에 학교 문법에 정식으로 반영됩니다. 또 고종석 씨가 『국어의 풍경들』에서 "게다가 한글은 그 놀라운 제자 원리에도 불구하고 한자처럼 음절 단위로 네모지게 모아 쓰게 돼 있어서, 음소 문자 본연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면서 한글의 모아쓰기를 비판한 것과는 달리, 이익섭 교수는 "모아쓰기가 풀어쓰기보다 독서 능률상 우리에게 아주 작은 편익이라도 준다면 우리는 이것을 버리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라면서 모아쓰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서 눈길을 끕니다.

그리고 "팔종성법(八終聲法)이라고 하여 표음(表音) 위주의 표기법을 채택해 쓰면서도 받침에서 'ㅅ'과 'ㄷ'을 철저히 구별해 표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표기에서의 규칙이었을 뿐 이 때에도 이미 받침의 'ㅅ'과 'ㄷ'은 대립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라고 해서 중세 국어 시기에는 음절말에서 'ㅅ'과 'ㄷ'이 변별되었다는 학계의 견해를 부정했는데, 개설서인 탓인지 그 논거는 제시하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아무래도 이익섭 교수가 쓴 다른 책을 찾아봐야 논거를 확인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한편, 『국어학개설』에서 나무랄 곳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알타이 어족과 한국어의 친족 관계를 설명하면서 몇 가지 단어를 예로 들었는데, 그 가운데 '말'은 한자어인 '馬'를 차용한 것이므로 한국어가 알타이 어족과 가깝다는 가설을 증명하기에는 알맞지 않습니다. "차용(借用)에 의해서가 아니면서 두 언어가 어원이 같은 단어들을 쓰고 있고, 그 단어들 사이에 일정한 음운의 대응이 이루어진다면 두 언어의 친족관계는 상당한 지지(支持)를 얻게 된다"라는 설명이 무색할 만큼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저지른 셈이지요. 사실 이는 이기문 교수가 쓴 『國語史槪說(국어사개설)』의 "상당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 와 국어사 장을 서술하면서 저지른 잘못입니다. 이기문 교수가 저지른 잘못까지 그대로 옮겨 와 문제가 일어난 것이지요. 이런 잘못은 개정판에서 고쳐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길은 끝났습니다. 물론 개설서가 국어학의 세계를 그려 놓은 지도에는 아직 제가 가지 못한 곳이 숱합니다. 그래서 길은 끝났어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옛날에는 봐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넘어갔던 것들이 이제는 제법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저도 조금은 자랐나 봅니다.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절로 실감이 납니다. 먼 뒷날에 이 책을 다시 보면 그때는 무엇이 보일지 궁금합니다. 그때도 제 앞에 놓인 책이 '손때 고운 책'으로 제 곁에 남아 있었으면 합니다.

첨언 하나. 제가 지닌 『국어학개설』은 2000년에 발행된 재판(2판)입니다. 지난 2011년에 3판이 나왔습니다. 저는 아직 3판을 읽지 않았습니다.

첨언 둘. 중세 국어에서 종성 'ㅅ'과 'ㄷ'의 음가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고영근 교수는 『표준 중세국어문법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현대국어는 받침의 'ㅅ'가 'ㄷ'와 차이가 없어 다 같이 [tㄱ]로 발음된다. 그러나 중세국어에서는 발음이 달랐던 것이 틀림없다. 종성에 8자만 허용한다는 것은 음소적 원리에 의한 표기법인데, 이 가운데 'ㄷ'와 'ㅅ'가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은 두 글자의 발음이 달랐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중세국어 문헌에서는 'ㄷ'와 'ㅅ'가 잘 구별되어 쓰였다. (중략)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중세국어 종성의 'ㅅ'는 끝에 치성(齒性)이 약간 들리는 [sㄱ] 정도가 아닌었던가 한다."

또 제7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문법』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종성에 쓰이는 글자 가운데에서 특이한 것은 'ㅅ'이다. 현대에는 받침 'ㅅ'의 발음이 'ㄷ'과 차이가 없으나, 중세 국어에서는 치성(齒性)을 동반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발음 습관에 따라 'ㄷ' 소리로 읽고 있다."

첨언 셋. 임지룡, 이은규, 김종록, 송창선, 황미향, 이문규, 최웅환이 함께 쓴 『학교 문법과 문법 교육』에서는 '말[馬]'을 '배추[白菜], 수수[薥黍], 무명[木棉], 감자[甘藷], 붓[筆], 가지[茄子], 김치[沈菜], 시금치[赤根菜]'와 같이 묶어서 "어원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경우라면 한자에서 들어온 말이라는 사실을 모를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첨언 넷. 본문과 인용문의 한자 뒤 한글 병기는 작성자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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