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원로 국어학자인 이기문 교수는 문자의 환영(幻影)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했었습니다. 문자에 무슨 환영이 있느냐고 많은 분이 생각하시겠지만, 국어사를 공부할 때마다 이기문 교수의 말은 곰곰이 되씹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처럼 아주 오래된 책 하나가 놓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책에서 'ㅐ'라는 글자가 나타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읽으시겠습니까? 아마 옛말을 잘 알지 못하는 분이라면 그냥 [ɛ]라고 발음하겠지요. 오늘날 우리는 'ㅐ'를 [ɛ]라고 발음하니까요. 하지만 우리와 달리 조선인들은 'ㅐ'를 [ɛ]라고 발음하지 않고, [aj]라고 발음했었습니다. 조선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귀로 직접 듣지 않고도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훈민정음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기문 교수가 말한 '문자의 환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문자가 옛 문헌에 그대로 나온다고 해서 그 소릿값이 오늘날과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시간이 흐르면 언어의 형태나 의미가 달라지듯이 문자의 가치도 언제나 같지 않습니다.
물론 한다하는 국어학자도 문자의 환영에 사로잡히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중세 국어 문헌에 나오는 초성의 'ㅇ'이 오늘날처럼 소릿값이 없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에 대해 반론을 펼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차이가 꼭 문자의 환영에 사로잡힌 탓이라고만 볼 까닭은 없습니다. 같은 자료를 놓고 해석을 달리하는 것은 어느 학문이든지 일어나는 일이며, 연구 방법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면, 상대를 무턱대고 비난하면 안 되겠지요. 하지만 논거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억측과 편견만 늘어놓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첨언 하나. 본문에서는 언어학(그 가운데에서도 음운론과 국어사)의 관점으로 가림토를 비판했습니다. 소설가 이문영 씨는 『만들어진 역사』에서 '가림토의 진실'과 '가림토 문자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라는 글을 통해『환단고기(桓檀古記)』를 문헌 비판하면서 가림토의 허구성을 밝혀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첨언 둘. 본문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반재원 씨는 한문 해석을 너무 제멋대로 한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고전(古篆)'과 '토착(吐着)'을 왜 가림토로 해석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吐'를 가림토의 '토'와 억지로 연결 짓는 것도 우스꽝스럽지만, '篆'을 가림토와 연결 짓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첨언 셋. 정광 교수는 『훈민정음의 사람들』에서 정의공주 관련 기록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훈민정음으로 우리말, 즉 고유어를 기록하도록 발전한 것은 세종의 따님인 貞懿公主(정의공주)가 口訣(구결), 즉 吐(토)를 세종이 고안한 신문자로 기록하는 '變音吐着(변음토착)'의 방법을 강구하면서 가능하게 된다. 당시 釋讀口訣(석독구결)이나 誦讀口訣(송독구결)에 쓰인 口訣字(구결자)들은 대부분 略字(약자)를 사용하여 원래의 한자와는 많이 다르게 變貌(변모)하였다. 貞懿公主(정의공주)는 이러한 符號(부호)와 같은 구결자 대신에 신문자를 대입하여 표기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로부터 고유어를 신문자로 표기하도록 발전하게 된다. 왜냐하면 구결자로 표시된 형태부들은 모두 고유어의 조사와 어미들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이로부터 고유어를 자신이 고안한 신문자로 표기하는데 몰두하였는데 이것은 東宮(동궁), 首陽(수양), 安平(안평), 貞懿(정의) 등의 子女(자녀)들과 함께 작업하였다."
인용문의 한자 뒤 한글 병기는 인용자가 했습니다.
첨언 넷.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의 기록을 어느 정도 신뢰하고 나름 합리적인 해석을 하고자 했던 정광 교수와 달리 최경봉, 시정곤, 박영준 교수 세 사람은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에서 「한글, 누가 왜 만들었나」라는 글을 통해 『죽산안씨대동보』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그러나 "정의공주가 한글을 지었다"라는 기록은 이 말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빈약하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공주가 한글로 구결을 표음하는 문제를 해결했다"라는 기록 역시 한글 창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것이란 점에서 이를 근거로 공주가 한글 창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성운학과 문자학에 능통한 집현전 학사들이 있었는데도 왕과 대군들이 한글로 구결을 표음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공주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왕이 공주에게 노비 수백 구를 하사했다는 대목은 당시의 포상 관례에도 맞지 않는다. 개국 공신에게 내린 노비가 30여 구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의공주와 관련된 기록은 사실 관계에서 허점이 드러나는 자료란 점에서 한글 창제가 왕실의 비밀프로젝트로 추진되었다는 설의 중요한 근거 중 하나가 의심을 받게 되었다."
『죽산안씨대동보』의 훈민정음 창제 관련 기록은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서 볼 수 있습니다(바로 가기).
첨언 다섯. "사라진 한글 네 글자가 살아나는 순간, 우리 한글은 전 세계 모든 언어를 그 발음 그대로 표현해낼 수 있다."라는 반재원 씨의 주장을 좀더 자세히 살필 수 있는 기사가 <오마이뉴스>에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관련 기사). 이 기사에서 반재원 씨는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나의 연구내용을 평가하기에 앞서 비전공자라는 것에 아예 책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라고 말했는데, 제가 봤을 때 반재원 씨의 문제는 전공 여부가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처럼 아주 오래된 책 하나가 놓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책에서 'ㅐ'라는 글자가 나타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읽으시겠습니까? 아마 옛말을 잘 알지 못하는 분이라면 그냥 [ɛ]라고 발음하겠지요. 오늘날 우리는 'ㅐ'를 [ɛ]라고 발음하니까요. 하지만 우리와 달리 조선인들은 'ㅐ'를 [ɛ]라고 발음하지 않고, [aj]라고 발음했었습니다. 조선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귀로 직접 듣지 않고도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훈민정음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기문 교수가 말한 '문자의 환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문자가 옛 문헌에 그대로 나온다고 해서 그 소릿값이 오늘날과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시간이 흐르면 언어의 형태나 의미가 달라지듯이 문자의 가치도 언제나 같지 않습니다.
물론 한다하는 국어학자도 문자의 환영에 사로잡히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중세 국어 문헌에 나오는 초성의 'ㅇ'이 오늘날처럼 소릿값이 없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에 대해 반론을 펼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차이가 꼭 문자의 환영에 사로잡힌 탓이라고만 볼 까닭은 없습니다. 같은 자료를 놓고 해석을 달리하는 것은 어느 학문이든지 일어나는 일이며, 연구 방법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면, 상대를 무턱대고 비난하면 안 되겠지요. 하지만 논거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억측과 편견만 늘어놓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한글 새소식』 제465호(바로 가기)에 실린 「'자방고전'과 '무소조술'에 대한 견해」라는 글에서 "세종은 문자 창제에 있어서 단군 때의 가림토를 많이 참고했을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주장한 반재원 씨의 주장을 살펴볼까요. 반재원 씨는 "『단군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3세 가륵 단군 때 삼랑 을보륵이 만든 가림다문을 보면 가운데 소리 11자는 훈민정음의 가운데 소리 11자와 똑같다."라고 말하며, 이는 세종이 가림토를 참고했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 하나만 봐도 훈민정음 연구소장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지닌 반재원 씨의 언어학 지식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의 생각과 달리 가림토의 글꼴이 훈민정음의 그것과 같다는 사실은 가림토가 훈민정음을 베낀 가상의 문자임을 방증합니다.
가림토와 훈민정음의 중성자가 서로 일치한다는 것은, 이들 두 문자가 기록한 언어의 모음 체계가 다르지 않음을 전제합니다. 실제로 가림토가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말하는 가림토 중성자의 소릿값은 훈민정음의 그것과 똑같습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말했다시피 언어는 변화하기 마련이며, 문자의 가치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중세 국어의 [aj]가 근대 국어와 와서 [ɛ]로 바뀌었듯이 우리말은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곰'이라는 단어를 후기 중세 국어를 썼던 조선인이 [kom]이라고 발음했다면(현대 국어를 쓰는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전기 중세 국어를 썼던 고려인은 [*kum]이라고 발음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려인들은 'ㅗ(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후기 중세 국어의 'ㅗ'에 대응하는 전기 중세 국어의 모음)'를 [o]가 아닌 [u]라고 발음했던 것이지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고려는 40년에 걸친 몽골과의 전쟁(1231~1270)이 끝난 다음에 원(元)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됩니다. 이때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1259~1297)나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1365) 같은 몽골족이 고려에 많이 들어왔고, 몽골족을 따라서 몽골어도 고려에 흘러들었는데, 그 가운데 몇몇 단어는 우리말 속에 들어와 자리 잡게 됩니다. 임금이 먹는 밥을 가리키는 '수라(sülen)', 무관이 입던 옷을 가리키는 '철릭(terlig)', 새매의 수컷을 가리키는 '난추니(način)' 같은 말이 그것입니다.
이를 눈여겨본 국어학자들은 그 흔적들을 더듬어 전기 중세국어의 모음 체계를 재구성했습니다. 등에 검은 털이 난 누런 말을 가리키는 몽골어 'qura'가 우리말에서는 '고라'로 차용되었는데, 고려인들이 'ㅗ'를 [o]로 발음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그렇다면, 고려인들은 'ㅜ'를 무엇이라고 발음했을까요? 여러분 가운데 눈치 빠른 분이라면, 벌써 앞에 나온 '수라'와 'sülen'을 비교해서 'ㅜ'에 해당하는 소리를 찾으셨겠지요.
이처럼 고려의 백성들이 큰 고통을 받았던 때 들어온 몽골어가 오늘날에는 국어사 연구의 유용한 자료가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만, 이제 여러분도 우리말이 많은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을 아셨을 겁니다. 시대적으로 가까운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모음 체계가 이만큼 다른데, 하물며 고려 시대보다 더 먼 옛날인 고조선 시대는 어땠겠습니까?
또한, 고대 국어에는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된소리를 적을 수 있는 글자가 가림토에 있는 것을 보면, 가림토를 만든 이는 예나 이제나 음운 체계는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었나 봅니다. 하지만 이렇게 엉터리로 만들어진 가림토의 성격을 판단할 능력도 없는 반재원 씨가 어떤 일을 벌이는지 알아보니 제 입에서는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반 소장은 삼 년째 한글날 공식행사에서 세종대왕으로 분장하여 훈민정음 서문을 원음 그대로 낭독하고 있다. 한글학회장도 국립국어원장도 아닌 그가 공식행사에서 훈민정음을 낭독하는 이유는 훈민정음 본래 음가를 살려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 인터넷신문(관련 기사)에서 반재원 씨를 이렇게 소개하기에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사실이더군요(관련 기사). 그런데, "훈민정음 본래 음가를 살려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라는 반재원 씨는 이런 주장을 펼칩니다.
"그런데 반 소장은 'ㆍ(아래 아)'를 'ㅏ'로 읽지 않는다. 그는 'ㆍ'를 '깊은 음'이라고 부르며 함께 쓰이는 자음에 따라 발음을 달리한다."
『훈민정음』에서는 'ㆍ'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ㆍ(소리)는 혀를 오그라지게 해서 조음하고 소리는 깊으니, 하늘이 자(子)시에 열린 것과 마찬가지로 ㆍ자가 맨 먼저 생겨났다. 모양이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다."
이 기록을 아무리 뜯어봐도 'ㆍ'의 소릿값이 유동적이라는 반재원 씨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반재원 씨가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펼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사라진 한글 네 글자가 살아나는 순간, 우리 한글은 전 세계 모든 언어를 그 발음 그대로 표현해낼 수 있다."라고 용감하게(?) 외치는 반재원 씨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아, 참고로 이제는 사라진 우비흐어는 80개가 넘는 자음을 가졌었다고 합니다. 한글의 자음자는 20개가 채 안 되지요.
이제까지 살펴봤듯이, 가림토는 가상의 문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많은 사람이 문자의 환영에 사로잡혀 가림토가 실존했다고 믿습니다. 반재원 씨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이고요. 문제는 언어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반재원 씨가 전문가 행세를 하면서 혹세무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허황된 주장을 담은 글을 어떻게 한글학회가 받아줬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학회라면 시민들에게 신뢰할 만한 내용을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한글학회가 스스로 권위를 허물어뜨리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가림토와 훈민정음의 중성자가 서로 일치한다는 것은, 이들 두 문자가 기록한 언어의 모음 체계가 다르지 않음을 전제합니다. 실제로 가림토가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말하는 가림토 중성자의 소릿값은 훈민정음의 그것과 똑같습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말했다시피 언어는 변화하기 마련이며, 문자의 가치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중세 국어의 [aj]가 근대 국어와 와서 [ɛ]로 바뀌었듯이 우리말은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용비어천가』, 출처 위키백과
'곰'이라는 단어를 후기 중세 국어를 썼던 조선인이 [kom]이라고 발음했다면(현대 국어를 쓰는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전기 중세 국어를 썼던 고려인은 [*kum]이라고 발음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려인들은 'ㅗ(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후기 중세 국어의 'ㅗ'에 대응하는 전기 중세 국어의 모음)'를 [o]가 아닌 [u]라고 발음했던 것이지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고려는 40년에 걸친 몽골과의 전쟁(1231~1270)이 끝난 다음에 원(元)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됩니다. 이때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1259~1297)나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1365) 같은 몽골족이 고려에 많이 들어왔고, 몽골족을 따라서 몽골어도 고려에 흘러들었는데, 그 가운데 몇몇 단어는 우리말 속에 들어와 자리 잡게 됩니다. 임금이 먹는 밥을 가리키는 '수라(sülen)', 무관이 입던 옷을 가리키는 '철릭(terlig)', 새매의 수컷을 가리키는 '난추니(način)' 같은 말이 그것입니다.
이를 눈여겨본 국어학자들은 그 흔적들을 더듬어 전기 중세국어의 모음 체계를 재구성했습니다. 등에 검은 털이 난 누런 말을 가리키는 몽골어 'qura'가 우리말에서는 '고라'로 차용되었는데, 고려인들이 'ㅗ'를 [o]로 발음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그렇다면, 고려인들은 'ㅜ'를 무엇이라고 발음했을까요? 여러분 가운데 눈치 빠른 분이라면, 벌써 앞에 나온 '수라'와 'sülen'을 비교해서 'ㅜ'에 해당하는 소리를 찾으셨겠지요.
이처럼 고려의 백성들이 큰 고통을 받았던 때 들어온 몽골어가 오늘날에는 국어사 연구의 유용한 자료가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만, 이제 여러분도 우리말이 많은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을 아셨을 겁니다. 시대적으로 가까운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모음 체계가 이만큼 다른데, 하물며 고려 시대보다 더 먼 옛날인 고조선 시대는 어땠겠습니까?
또한, 고대 국어에는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된소리를 적을 수 있는 글자가 가림토에 있는 것을 보면, 가림토를 만든 이는 예나 이제나 음운 체계는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었나 봅니다. 하지만 이렇게 엉터리로 만들어진 가림토의 성격을 판단할 능력도 없는 반재원 씨가 어떤 일을 벌이는지 알아보니 제 입에서는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반 소장은 삼 년째 한글날 공식행사에서 세종대왕으로 분장하여 훈민정음 서문을 원음 그대로 낭독하고 있다. 한글학회장도 국립국어원장도 아닌 그가 공식행사에서 훈민정음을 낭독하는 이유는 훈민정음 본래 음가를 살려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 인터넷신문(관련 기사)에서 반재원 씨를 이렇게 소개하기에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사실이더군요(관련 기사). 그런데, "훈민정음 본래 음가를 살려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라는 반재원 씨는 이런 주장을 펼칩니다.
"그런데 반 소장은 'ㆍ(아래 아)'를 'ㅏ'로 읽지 않는다. 그는 'ㆍ'를 '깊은 음'이라고 부르며 함께 쓰이는 자음에 따라 발음을 달리한다."
『훈민정음』에서는 'ㆍ'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ㆍ(소리)는 혀를 오그라지게 해서 조음하고 소리는 깊으니, 하늘이 자(子)시에 열린 것과 마찬가지로 ㆍ자가 맨 먼저 생겨났다. 모양이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다."
이 기록을 아무리 뜯어봐도 'ㆍ'의 소릿값이 유동적이라는 반재원 씨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반재원 씨가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펼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사라진 한글 네 글자가 살아나는 순간, 우리 한글은 전 세계 모든 언어를 그 발음 그대로 표현해낼 수 있다."라고 용감하게(?) 외치는 반재원 씨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아, 참고로 이제는 사라진 우비흐어는 80개가 넘는 자음을 가졌었다고 합니다. 한글의 자음자는 20개가 채 안 되지요.
이제까지 살펴봤듯이, 가림토는 가상의 문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많은 사람이 문자의 환영에 사로잡혀 가림토가 실존했다고 믿습니다. 반재원 씨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이고요. 문제는 언어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반재원 씨가 전문가 행세를 하면서 혹세무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허황된 주장을 담은 글을 어떻게 한글학회가 받아줬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학회라면 시민들에게 신뢰할 만한 내용을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한글학회가 스스로 권위를 허물어뜨리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첨언 하나. 본문에서는 언어학(그 가운데에서도 음운론과 국어사)의 관점으로 가림토를 비판했습니다. 소설가 이문영 씨는 『만들어진 역사』에서 '가림토의 진실'과 '가림토 문자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라는 글을 통해『환단고기(桓檀古記)』를 문헌 비판하면서 가림토의 허구성을 밝혀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첨언 둘. 본문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반재원 씨는 한문 해석을 너무 제멋대로 한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고전(古篆)'과 '토착(吐着)'을 왜 가림토로 해석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吐'를 가림토의 '토'와 억지로 연결 짓는 것도 우스꽝스럽지만, '篆'을 가림토와 연결 짓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첨언 셋. 정광 교수는 『훈민정음의 사람들』에서 정의공주 관련 기록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훈민정음으로 우리말, 즉 고유어를 기록하도록 발전한 것은 세종의 따님인 貞懿公主(정의공주)가 口訣(구결), 즉 吐(토)를 세종이 고안한 신문자로 기록하는 '變音吐着(변음토착)'의 방법을 강구하면서 가능하게 된다. 당시 釋讀口訣(석독구결)이나 誦讀口訣(송독구결)에 쓰인 口訣字(구결자)들은 대부분 略字(약자)를 사용하여 원래의 한자와는 많이 다르게 變貌(변모)하였다. 貞懿公主(정의공주)는 이러한 符號(부호)와 같은 구결자 대신에 신문자를 대입하여 표기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로부터 고유어를 신문자로 표기하도록 발전하게 된다. 왜냐하면 구결자로 표시된 형태부들은 모두 고유어의 조사와 어미들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이로부터 고유어를 자신이 고안한 신문자로 표기하는데 몰두하였는데 이것은 東宮(동궁), 首陽(수양), 安平(안평), 貞懿(정의) 등의 子女(자녀)들과 함께 작업하였다."
인용문의 한자 뒤 한글 병기는 인용자가 했습니다.
첨언 넷.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의 기록을 어느 정도 신뢰하고 나름 합리적인 해석을 하고자 했던 정광 교수와 달리 최경봉, 시정곤, 박영준 교수 세 사람은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에서 「한글, 누가 왜 만들었나」라는 글을 통해 『죽산안씨대동보』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그러나 "정의공주가 한글을 지었다"라는 기록은 이 말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빈약하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공주가 한글로 구결을 표음하는 문제를 해결했다"라는 기록 역시 한글 창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것이란 점에서 이를 근거로 공주가 한글 창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성운학과 문자학에 능통한 집현전 학사들이 있었는데도 왕과 대군들이 한글로 구결을 표음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공주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왕이 공주에게 노비 수백 구를 하사했다는 대목은 당시의 포상 관례에도 맞지 않는다. 개국 공신에게 내린 노비가 30여 구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의공주와 관련된 기록은 사실 관계에서 허점이 드러나는 자료란 점에서 한글 창제가 왕실의 비밀프로젝트로 추진되었다는 설의 중요한 근거 중 하나가 의심을 받게 되었다."
『죽산안씨대동보』의 훈민정음 창제 관련 기록은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서 볼 수 있습니다(바로 가기).
첨언 다섯. "사라진 한글 네 글자가 살아나는 순간, 우리 한글은 전 세계 모든 언어를 그 발음 그대로 표현해낼 수 있다."라는 반재원 씨의 주장을 좀더 자세히 살필 수 있는 기사가 <오마이뉴스>에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관련 기사). 이 기사에서 반재원 씨는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나의 연구내용을 평가하기에 앞서 비전공자라는 것에 아예 책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라고 말했는데, 제가 봤을 때 반재원 씨의 문제는 전공 여부가 아닙니다.








덧글
초록불 2011/06/12 20:37 # 답글
쇼킹하네요.그런데, 고구려는 그렇다면 조선초에는 구규려라고 발음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건가요?
解明 2011/06/13 19:08 #
이기문 교수는 중세 국어에서의 모음 추이가 14세기에 일어났다고 보는데, 그때 언어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습니다. 이기문 교수의 생각이 옳다면, 조선 초기는 후기 중세 국어를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전기 중세 국어의 이중모음이 후기 중세 국어의 그것과 같았다고 한다면, 고려 시대에는 '고구려'를 [*kugürjʌ]라고 발음했을 겁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재구형이기에 당대의 현실과 맞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야스페르츠 2011/06/12 21:33 # 답글
ㄷㄷㄷ 이런 사람이 학자연하는 꼴이란 참... ㅠㅠ
解明 2011/06/13 19:12 #
세상에는 엉뚱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보리밭 2011/06/12 23:13 # 답글
고조선부터 문자가 있어 그것이 한글이 되었다는 주장을 트위터로 하시는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 주장을 책으로까지 냈더군요. 근데 그 설명들을 보면 참 제멋대로고 이해도 잘 안 되던데, 저런데 현혹되는 분들이 많은가봅니다. 재판까지 나왔다고 하더군요. 해명님 오랜만입니다.^^
解明 2011/06/13 19:17 #
저는 트위터 같은 SNS를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 일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인터넷에서 '유사역사학'이라고 비판을 받는 이들의 주장을 보면 서로 안 맞지요. 중국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다고 하면서 삼국의 강역을 그려 놓은 지도를 보면 가지각색입니다.
Warfare Archaeology 2011/06/12 23:46 # 답글
음. 재밌습니다. ^^ ㅋ 잘 봤습니다.
解明 2011/06/13 19:17 #
고맙습니다.
한단인 2011/06/12 23:59 # 답글
오랜만에 뵙는데 이렇게 양질의 포스팅까지.. 독자로서 감읍할 따름입니다.그나저나 언어 자체의 변화가 아니라 표음문자의 자모 음가가 시기별로 다르게 부여되었다는 것은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터라 꽤 쇼킹하군요.
解明 2011/06/13 19:31 #
올해는 월간 체제로 돌입했습니다. ^-^;문자의 음가가 고정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파벳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SBS에서 방송된 '노르망디의 코리안'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제작진이 독일에서 관련 명단을 찾다가 'Jung'이라는 인명을 보고 흥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국인 성씨 가운데 하나인 '정'을 가리키는 것 아니냐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곧바로 독일인들은 'Jung'을 '정'이나 '중'이 아닌 '융'이라고 읽는다는 것을 알고 좌절합니다. 영어권의 'j'와 독일어권의 'j'의 쓰임새가 다르다는 것을 몰라서 일어난 일이었지요.
한단인 2011/06/13 19:50 #
앗.. 그걸 생각 못했군요.
Warfare Archaeology 2011/06/13 23:11 #
음~바로 와닿는 비교 설명~ㅋ
아침의전령 2011/06/13 01:31 # 답글
'훈민정음 본래 음가를 살려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_-;;;;;;;;;;으음, 이거 뭐라고 해야할지.
아, 아래아의 음가가 유동적이라는 건, 후대에 아래아 표기가 ㅏ, ㅡ, ㅗ 등으로 다양하게 대치된 걸 보고 상상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애시당초 아래아에 음가가 있었는지조차 불명확하지만(....)
반재원 씨의 주장을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인용해 주신 부분만 보면 '문제는 전공 여부가 아닙니다'라는 평가가 딱 들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저 분은 국제음성기호IPA가 왜 필요한지조차 모를 것이다에 한 표를 던지고 싶군요-_-/
解明 2011/06/13 19:41 #
저도 그런 생각은 했는데, 제가 찾은 자료에서는 반재원 씨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주장했는지 나오지 않아서 본문에서는말하지 않았습니다. 반재원 씨가 그렇게 판단했더라도 'ㆍ'의 음가를 유동적이었다고 보는 것은 『훈민정음』의 설명을 너무 무시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네요.
지나가다 2011/06/13 12:17 # 삭제 답글
정작 이기문 선생께서 생각하신 ㅜ의 *y>u를 의심하여 알파벳표기상 ü에 해당하는 모음을 지닌 어휘를 조사해 보니, 막상 실질적으로는 u에 해당하는 케이스들이 많았음. 적어도 2000년대 이후로는 소위 vowel shift가 정말 고대의 한국어에 있었는지부터가 심각하게 의문되고 있음. 요즘 한국어의 역사음운론 하는 분들을 보면 vowel shift에 대해서 여쭈면 안절부절하시거나 아예 부정하시는 분들도 있더라.
解明 2011/06/13 19:44 #
이 글의 목적이 국어사 연구사를 개괄하는 것이 아닌 만큼 가장 대표적인 이기문 교수의 설명을 따라서 가림토의 문제점을 짚어 보았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에 관해 저나 다른 분들이 읽어볼 만한 자료가 무엇이 있는지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朴下史湯 2011/06/20 01:23 # 삭제 답글
쿠귀리예! 쿠귀리예! 쿠귀리예! 쿠귀리예! 쿠귀리예! 쿠귀리예! 쿠귀리예! 쿠귀리예! 쿠귀리예! 쿠귀리예!
解明 2011/06/20 21:28 #
그렇게 읽는 게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
Esperos 2011/06/30 23:34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글 쓰셨군요 . 언어의 변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헛소리를 일삼곤 하죠.
解明 2011/07/01 18:40 #
저도 국어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언어의 변화를 어휘의 변화쯤으로 좁게 생각했었고, 국어학과 국어사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저런 말에 속을 수 있겠지요.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니까요.
highseek 2011/07/11 23:40 # 답글
정말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두고두고 자료로 쓰고 싶네요.
解明 2011/07/12 21:18 #
고맙습니다.
2011/08/26 12:54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解明 2011/08/27 15:36 #
그렇게 말씀하시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