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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

2009년 8월 20일 이전까지 블로그에 썼던 글들의 공개설정은 모두 '공개로'에서 '비공개로'로 바꿨습니다. 이 글은 2009년 10월 7일에 포스트 등록시간을 '2009년 12월 13일 23시 59분'으로 바꿨으며, 2009년 12월 1일에 포스트 제목과 내용을 고쳤습니다.

추가. 2010년 1월 2일에 포스트 등록시간을 '2010년 12월 31일 23시 59분'으로 바꿨습니다.

by 解明 | 2010/12/31 23:59 | 트랙백 | 덧글(28)

촌놈들의 언어 제국주의

앵무새는 사람의 말소리를 흉내 낼 수 있어도, 그 뜻까지 아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앵무새 앞에서 "안녕하세요."라고 말한다면 앵무새는 어렵지 않게 "안녕하세요."라고 소리는 내겠지만, 그 말이 인사말인 줄은 모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앵무새의 재주에 놀라워하며 손뼉을 치고 모이를 줍니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게 보입니다만, 이와 비슷한 일은 사람 사이에서도 가끔 생기곤 하죠.

지난해가 끝날 무렵에 서울을 찾았었던 찌아찌아족 일행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네의 말을 적을 문자로 한글을 선택했다는 소식이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졌었기에 그네의 나들이는 언론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었죠. 그때 길라잡이로 나섰던 오세훈 서울시장은 그네를 데리고 광화문 광장으로 갔었습니다. 새로 만든 세종대왕 동상이 광장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었기에 자리는 제법 괜찮았지만, 일은 거기에서 벌어졌죠.

계획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요청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일행 가운데 한 소녀가 동상 앞에 새겨진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을 읽게 되었습니다. 받침이 들어간 한글 표기를 발음하기 어려웠던 탓인지 소녀는 더듬거리며 한 줄을 겨우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소녀가 읽기를 마치자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습니다. 마치 앵무새가 말을 한다고 놀라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소녀가 한글을 읽을 수 있어도 한국어까지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글 '수출'이라는 '쾌거' 앞에서 그 차이는 간단히 무시된 것이죠.

거기에 더해 이 일을 디딤돌로 삼아 '한글'('한국어'가 아닙니다)을 '세계 공용어'로 삼아야 한다는 몇몇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저는 언어 제국주의의 어렴풋한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그런 제 생각은 그로부터 며칠 뒤에 인도네시아 바우바우시(市)에 원암한국문화원을 세울 거라는 언론 보도를 접하면서 더욱 굳어졌습니다. 언론에서는 원암한국문화원을 가리켜 '한글 성지'라는 수식어를 붙였는데, 이는 우리와 역사·종교·문화가 다른 인도네시아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아주 위험한 표현이죠.

무엇보다도 저는 원암한국문화원이 문화 교류라는 목적에 충실하기보다는 한글을 앞세워 한국어를 '전파'하는 언어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오늘날 영어가 세계 공용어에 버금가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영국과 미국이 전 세계 곳곳에 세웠던 문화원의 역할이 적지 않았던 것을 떠올린다면 말이죠. 이런 제 생각이 그저 기우에 그친다면 다행이겠지만, 찌아찌아어 교과서를 만든 사람 가운데 하나인 이호영 교수는 일찍이 한 방송에 나와서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한글을 표기법으로 이렇게 만들어서 문자 없는 민족에게 보급해 주면은, 이 민족들이 한글을 쓰면서 한국에 대해서 굉장히 가깝다는 느낌을 느끼게 되거든요. 그러다 보면 당연히 한국어를 배워 보겠다는 욕망이 생기고, 그러면은 자연스럽게 소수민족에게까지도 한국어가 보급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저는 그동안 소수 언어를 채록하는 데 힘쓴 이호영 교수의 노고를 깎아내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어와의 경쟁에서 밀려 사멸 위기에 몰린 소수 언어가 한국어라는 새로운 경쟁자까지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그 언어 생태계는 더 크게 흔들릴 것입니다. 한글 보급에 이은 한국어 전파라는 어쩌면 이호영 교수의 생각을 구체화한 원암한국문화원의 위험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쓰든 한국어로 말하든 어디까지나 그네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냐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준주변부인 우리와 주변부인 찌아찌아족 사이의 힘을 견주어본다면 찌아찌아족의 선택이 아주 자유롭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미룰 타밈 바우바우시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말하면서 우리의 경제성장을 높이 평가한 것을 보면, 그네가 한글을 선택한 까닭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죠. 이호영 교수가 말한 '욕망'도 언어적 호기심보다는 경제적 이익에 바탕을 둔 심성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한글 성지를 세우고 한국어를 전파하는 것보다도 찌아찌아족의 구전 설화와 민요를 채록하고, 사전을 만들고, 문법을 정리하는 일이 소수 언어 보존이라는 목적에 더 맞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리 선의의 의도를 갖고 시작한 일이라고 해도 그것이 때로는 더 큰 불행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늘 스스로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사족

by 解明 | 2010/02/21 20:39 | 세설(世說) | 트랙백 | 덧글(48)

영화 <쌍화점>과 구개음화

지난해 개봉했었던 영화 <쌍화점>을 보면 왕후(송지효 분)가 <가시리>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에서 왕후는 『악장가사』와 『시용향악보』에 적힌 것과 같은 노랫말로 노래합니다. 영화 속에서 왕후는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는 오늘날 우리처럼 현대국어로 말을 하면서도 노래를 부를 때는 갑자기 중세국어를 쓰는 것이지요. 물론 대다수 관객은 옛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모순쯤은 일종의 컨벤션으로 생각하고 너그러이 넘어갔을 겁니다.

사실 <가시리>는 노랫말이 어렵지 않아서 옛말로 부르나 이젯말로 부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노랫말에서 중세국어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을 꼽으라면 아마도 '날러는 엇디 살라고'라는 구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에서 '엇디'는 오늘날의 '어찌'와 같은 말인데, 우리말에서 아직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의 형태를 지녔습니다.

구개음화란 쉽게 말하면, 구개음이 아닌 소리가 구개음으로 바뀌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일출(日出)을 뜻하는 말을 '해돋이'라고 적지만 소리를 낼 때는 [해도지]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굳히다'는 '굳히다'라고 쓰면서도 [*구티다]가 아닌 [구치다]라고 소리 내지요. 다시 말해서 'ㄷ'과 'ㅌ'은 치조음이지만 모음 'ㅣ'를 만나면 구개음인 'ㅈ'과 'ㅊ'으로 바뀝니다. 가끔 인터넷에서 몇몇 사람이 '굳이'를 '구지'라고 적기도 하는데, 이는 구개음화가 일어나는 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탓입니다.

영화 <쌍화점>, 출처 Daum 영화

이처럼 구개음화는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중세국어에서는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옛사람들이 '조선'을 '됴션'으로, '부처'를 '부텨'로 적었던 것은 그들이 유별나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소리 냈기 때문이죠. 그러면 구개음화는 언제 처음 일어났을까요? 유희(柳僖, 1773~1837)가 쓴 『언문지』에는 구개음화에 얽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의 습관에 '댜, 뎌'를 '쟈, 져'와 같게 발음하고 '탸, 텨'를 '챠, 쳐'와 같게 발음한다. 이는 안이(按頥 : 중성이 ㅑ, ㅕ, ㅛ, ㅠ, ㅣ 등인 자모) 중에서 이들(댜, 뎌, 탸, 텨)은 어렵고 저들(쟈, 져, 챠, 쳐)은 쉽기 때문이다. 지금 오직 관서 사람들은 '天 텬'과 '千 천'을 다르게 발음하고 '地 디'와 '至 지'를 다르게 발음한다. 또 정씨 어른께서 그 고조의 형제분이 한 분은 '知和(디화)'요 한 분은 '至和(지화)'였는데 그 당시에는 아직 이 두 이름이 혼동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므로 '디'와 '지'의 혼동은 그리 옛날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바 있다.
(如東俗댜뎌呼同쟈져 탸텨呼同챠쳐 不過以按頥之此難彼易也 今唯關西之人 呼天不與千同 呼地不與至同 又聞鄭丈言 其高祖昆弟 一名知和 一名至和 當時未嘗疑呼 可見디지之混 未是久遠也)

유희가 말하는 정씨 어른은 그의 스승인 정동유(鄭東愈, 1744~1808)를 가리키는데, 정동유의 고조부가 살아있었을 때는 아직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를 17세기 중엽 전후라고 한다면, 구개음화는 그보다 조금 뒤인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동안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겠죠. 이로써 구개음화는 모음 'ㆍ'의 소실, 이중모음의 단모음화, 원순모음화, 전설모음화 등과 함께 근대국어의 특징을 이루는 음운변화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이렇게 영화에서 중세국어의 흔적을 희미하게 느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라틴어와 아람어를 써서 예수 당대의 삶을 되살리고자 했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처럼 우리에게도 모든 대사에 옛말을 쓴 영화가 나오면 어떨까 하고 말이죠. 물론 남아있는 중세국어 자료가 입말보다는 글말에 가깝고 불경을 언해한 것이 많아서 대사에 쓸만한 말을 찾기가 쉽지 않겠지만요.

사족

by 解明 | 2009/12/17 00:28 | 역사(歷史)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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