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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

2009년 8월 20일 이전까지 블로그에 썼던 글들의 공개설정은 모두 '공개로'에서 '비공개로'로 바꿨습니다. 이 글은 2009년 10월 7일에 포스트 등록시간을 '2009년 12월 13일 23시 59분'으로 바꿨으며, 2009년 12월 1일에 포스트 제목과 내용을 고쳤습니다.

추가. 2010년 1월 2일에 포스트 등록시간을 '2010년 12월 31일 23시 59분'으로 바꿨습니다.

by 解明 | 2010/12/31 23:59 | 트랙백 | 덧글(21)

영화 <쌍화점>과 구개음화

지난해 개봉했었던 영화 <쌍화점>을 보면 왕후(송지효 분)가 <가시리>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에서 왕후는 『악장가사』와 『시용향악보』에 적힌 것과 같은 노랫말로 노래합니다. 영화 속에서 왕후는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는 오늘날 우리처럼 현대국어로 말을 하면서도 노래를 부를 때는 갑자기 중세국어를 쓰는 것이지요. 물론 대다수 관객은 옛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모순쯤은 일종의 컨벤션으로 생각하고 너그러이 넘어갔을 겁니다.

사실 <가시리>는 노랫말이 어렵지 않아서 옛말로 부르나 이젯말로 부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노랫말에서 중세국어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을 꼽으라면 아마도 '날러는 엇디 살라고'라는 구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에서 '엇디'는 오늘날의 '어찌'와 같은 말인데, 우리말에서 아직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의 형태를 지녔습니다.

구개음화란 쉽게 말하면, 구개음이 아닌 소리가 구개음으로 바뀌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일출(日出)을 뜻하는 말을 '해돋이'라고 적지만 소리를 낼 때는 [해도지]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굳히다'는 '굳히다'라고 쓰면서도 [*구티다]가 아닌 [구치다]라고 소리 내지요. 다시 말해서 'ㄷ'과 'ㅌ'은 치조음이지만 모음 'ㅣ'를 만나면 구개음인 'ㅈ'과 'ㅊ'으로 바뀝니다. 가끔 인터넷에서 몇몇 사람이 '굳이'를 '구지'라고 적기도 하는데, 이는 구개음화가 일어나는 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탓입니다.

영화 <쌍화점>, 출처 Daum 영화

이처럼 구개음화는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중세국어에서는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옛사람들이 '조선'을 '됴션'으로, '부처'를 '부텨'로 적었던 것은 그들이 유별나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소리 냈기 때문이죠. 그러면 구개음화는 언제 처음 일어났을까요? 유희(柳僖, 1773~1837)가 쓴 『언문지』에는 구개음화에 얽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의 습관에 '댜, 뎌'를 '쟈, 져'와 같게 발음하고 '탸, 텨'를 '챠, 쳐'와 같게 발음한다. 이는 안이(按頥 : 중성이 ㅑ, ㅕ, ㅛ, ㅠ, ㅣ 등인 자모) 중에서 이들(댜, 뎌, 탸, 텨)은 어렵고 저들(쟈, 져, 챠, 쳐)은 쉽기 때문이다. 지금 오직 관서 사람들은 '天 텬'과 '千 천'을 다르게 발음하고 '地 디'와 '至 지'를 다르게 발음한다. 또 정씨 어른께서 그 고조의 형제분이 한 분은 '知和(디화)'요 한 분은 '至和(지화)'였는데 그 당시에는 아직 이 두 이름이 혼동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므로 '디'와 '지'의 혼동은 그리 옛날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바 있다.
(如東俗댜뎌呼同쟈져 탸텨呼同챠쳐 不過以按頥之此難彼易也 今唯關西之人 呼天不與千同 呼地不與至同 又聞鄭丈言 其高祖昆弟 一名知和 一名至和 當時未嘗疑呼 可見디지之混 未是久遠也)

유희가 말하는 정씨 어른은 그의 스승인 정동유(鄭東愈, 1744~1808)를 가리키는데, 정동유의 고조부가 살아있었을 때는 아직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를 17세기 중엽 전후라고 한다면, 구개음화는 그보다 조금 뒤인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동안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겠죠. 이로써 구개음화는 모음 'ㆍ'의 소실, 이중모음의 단모음화, 원순모음화, 전설모음화 등과 함께 근대국어의 특징을 이루는 음운변화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이렇게 영화에서 중세국어의 흔적을 희미하게 느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라틴어와 아람어를 써서 예수 당대의 삶을 되살리고자 했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처럼 우리에게도 모든 대사에 옛말을 쓴 영화가 나오면 어떨까 하고 말이죠. 물론 남아있는 중세국어 자료가 입말보다는 글말에 가깝고 불경을 언해한 것이 많아서 대사에 쓸만한 말을 찾기가 쉽지 않겠지만요.


사족

by 解明 | 2009/12/17 00:28 | 역사(歷史) | 트랙백 | 덧글(11)

한글의 우수성을 말하기 전에

우리에게 한글은 어쩌면 공기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늘 가까이 있어서 소중한 줄 모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해마다 돌아오는 한글날이 되면 우리는 한글의 우수성을 찬양하고 오늘날의 언어 실태에 대해서 반성을 하면서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뒀던 고마움과 미안함을 조금씩 풀어내고는 합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글날이 가까워지자 언론에서는 지자체의 선전문구나 거리의 간판이 '영어'로 범벅되어 '한글'을 홀대한다고 지적했으며, 네티즌 사이에서도 '외계어'나 다름없는 통신언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한자어에 밀려 고유어가 설 자리를 잃게 된 현실을 개탄한 이천만 씨의 글도 그와 같은 목소리와 맥을 같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가 제게는 조금 무겁게 다가옵니다. 물론 한글과 고유어를 아끼고 사랑하자는 이야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천만 씨의 글을 읽으면서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에 이렇게 글을 씁니다.

첫째, 이천만 씨는 문자인 '한글'과 언어인 '한국어'를 제대로 구별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수입했으면 좋겠지만 자기들의 언어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가 한글이었기에 세계 공용어 영어를 제치고 한글을 수입했다.'라는 문장을 보면 문자인 '알파벳'과 언어인 '영어'의 개념도 서로 뒤섞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 문장만 보면 찌아찌아족이 받아들이려고 한 것이 영어인 것 같기도 하고 알파벳 같기도 하고 한글 같기도 합니다. 물론 한국어와 한글은 서로 맞닿을 적이 많기에 평소에 잘 의식하지는 않지만, 둘은 엄격히 구별해야만 합니다. 한국어가 공용어가 될 수는 있어도 한글이 공용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이천만 씨는 '유엔 세계문화유산에서는 한글이 유일하게 문자유산으로 채택되었다'라고 하셨는데, 세계문화유산을 지정하는 곳은 유엔 산하의 유네스코입니다. 또한, 한글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채택된 일은 없습니다. 한글이 세계문화유산이 아닌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이야기도 항간에 펴졌습니다만, 이것도 잘못입니다.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문자인 한글(또는 훈민정음)이 아닌 한글의 창제원리를 설명한 책인 『훈민정음』입니다. 얼마 전 광화문 광장에 들어선 세종대왕 동상의 손에 들린 것이 바로 그 『훈민정음』입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서 잘 아는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國之語音 異乎中國)'라는 문구도 이 책에 있죠. 한마디로 유네스코는 기록물인 『훈민정음』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지 문자인 한글의 가치를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셋째, 이천만 씨는 '겹자음이 많은 언어들을 문자로 표현하는 데 지구상에서 한글을 따를 문자가 없다'면서 영어의 의성어 표현의 한계나 일본인의 영어 발음의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자를 쓰더라도 닭 울음소리와 같은 물리적 소리는 똑같이 적을 수 없습니다. 영어 화자가 닭 울음소리를 'cock-a-doodle-doo'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렇게 적을 뿐이지 알파벳의 문제 때문에 'cock-a-doodle-doo'라고 적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영어 문장을 가나로 적든 한글로 적든 원어의 발음과는 거리가 먼 어떤 소리가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어의 발음 문제는 문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모국어의 음운 체계에 따른 것이지요.

이를테면, 'ㄹ'의 경우 탄설음 [r]과 설측음 [l]을 모두 아우르는 문자입니다. 'ㄱ'도 초성에 오느냐 종성에 오느냐 유성음 사이에 오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음성이지만 문자만 봐서는 이런 차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를 발음하면서 유성음과 무성음을 구별하는 것만 놓고 본다면 일본어 화자가 한국어 화자보다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찌아찌아족이 그네의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로 한글을 선택한 것은 알파벳과는 다른 특성이 있는 한글의 장점을 높이 산 까닭도 있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한국의 경제적 지원을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글이 문자의 역사에서 음운 문자에서 자질 문자로 나아간 획기적인 문자임은 틀림없습니다만, 가끔 잘못된 사실에 기초해서 한글을 지나치게 드높이는 것을 볼 때면 민망한 마음이 들고는 합니다. 물론 제가 지적한 것들은 이천만 씨 혼자만의 잘못은 아닙니다. 언론도 한글과 한국어를 제대로 구별하지 않고 있으며, 학교 교육도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해마다 한글을 '홀대'한 것에 대해 반성해도 제대로 고쳐지지 않는 것은 한글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걸까요?


사족

by 解明 | 2009/11/08 15:38 | 세설(世說) | 트랙백 | 덧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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